1980년 52세 야당 지도자이자 민주 투사 김영삼(1928~2015·이하 YS)은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오랜 기간 서울 상도동 집에서 나올 수 없었다. 1980년 5월 20일부터 1981년 5월 1일까지 1차 가택 연금, 1982년 5월 31일부터 1983년 5월 30일까지 2차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 사이 기간에도 정치 활동은 금지됐다. YS는 연금 중이던 1983년 5월 18일부터 23일간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단식 투쟁을 벌여 스스로 정국 반전의 계기를 만든다. YS는 그 시절 상당한 분량의 일기를 남겼다.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은 물론 소소한 일상사까지 당대 역사를 돌아보는 소중한 자료다. YS 차남 김현철 김영삼재단 이사장이 당시 일기를 본지에 단독 공개했다. 중소기업대출금리인하
김영삼대통령기록전시관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민당 총재 때인 1980년 5월 20일부터 1년간 1차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해 9월 7일 일기에서 “일반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오지도 못하지만 나도 바깥출입이 되지 아니한다. 밖에서 경찰서원이 지키고 24시간 서 있다”고 적었다. 사진은 서울 상도 일치하는지 동 YS 자택 앞을 전투 경찰들이 막고 있는 모습.
YS는 1980년 9월 7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앞서 5월 20일부터 ‘가택 연금’ 중이었다. YS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날이 연금 ‘111일째’라고 밝혔다. YS는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인 ‘서울의 취업준비기간 봄’ 기간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신민당을 비롯한 정당 해산, 정치 활동 규제 대상자 발표 등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소회도 피력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와 전두환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서도 썼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ibk기업은행 적금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곳곳에서 토로한다.
그래픽=백형선
1980. 9.7. 일 학생 때 일기를 써보고 지금껏 일기라고 쓰지 않았다. 지난 5월 20일부터 지금까지 ‘111일째’ 아직까지 집안 무직자중고차전액할부 에서 연금 상태다. 밖에서 경찰서원이 지키고 24시간 서 있다. 오늘은 막내딸 혜숙이가 성심여대도 다른 대학과 같이 학원이 쉬기 때문에 지금껏 집에 얌전히 있다가 오늘 춘천 기숙사로 들어갔다. 현관에 서서 차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저도 손을 흔들면서 한없이 운다. 떠나기 전에 잘 다녀오라고 사랑스러운 딸을 안아주었다. 9. 9. 화 연금 생활을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참는 것’, 인자(忍者)는 무적(無敵)이다. 참는 것이 가장 어렵고 또한 가장 귀한 것이다. 나는 혁명가는 아니다. 5·17 직후까지만 해도 광주사태 후에도 이 땅에 민주주의만 하면 그 엄청난 ‘상처’도 아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무슨 짓을 해도 국민의 상처를 고칠 수는 없다. 정말로 민족의 장래와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안타까운 일이다. 9.13. 토 아침 김 실장(김덕룡 신민당 총재 비서실장)이 와서 그저께 저녁인가 전(全·전두환)이 출입 기자들과 술이 취하도록 같이 먹었는데 이야기 중에 특히 1) 군은 앞으로 안보만 하도록 하겠다 2) 돈 안 드는 정치를 하겠다 3) 언론에 대해서 손질을 하겠다 4) 정치 자금은 내가 직접 모아서 정당에 공개적으로 돌려주도록 하겠다 이런 이야기하더라고 한다. 정말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다. 9.16. 화 지난 5월 전에 오직 김대중이만 물리치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민당의 공천만 받으면 문제는 해결난다고 생각했다. 박 정권의 20년 독재와 부정부패 때문에 김종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의 비극이 오고 만 것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을 읽었다. 한국 문제가 앞으로 정말 문제이다. 기획 기사 중에서 박정희의 5·16 당시와 다른 큰 차이는 (박정희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정권을 잡았는데 (전두환은) 광주에서 200명 이상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그러한 큰 차이다. 박정희는 선거에 의해서 윤보선씨와 싸워 이겼다. 전(全)은 ‘3김’을 다 못 나오게 해놓고 실질적으로 혼자 선거하는 것이다.
김영삼재단YS는 가택 연금 중 한글·한자를 섞어 일기를 썼다.
9.25. 목 아침 신문을 보니까 국보위(신군부가 만든 통치 기구)에서 앞으로 국회가 할 입법은 다 하고 국민투표에서 (개정 헌법) 부칙에 국회 해산, 정당 해산, 구 정치인들을 규제하는 특별법을 앞으로 제정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본은 모든 사람이 자유스럽게 국민에 의해서 선택되고 심판을 받는 것이어야지 인위적으로 원천적으로 입후보 자체를 못 하도록 하는 것은 용납할 수도 없고 용납되어서도 안 된다. 9.29. 월 이 사람들이 오늘 헌법 개정을 한다고 10월에 국민투표를 한다고 공고했다. 정말 이 나라의 장래는 악순환만 있을 뿐이다. 진실한 선거가 없는 민주주의가 어디 있단 말이냐. 사전에 힘으로 중요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은 입후보를 못 하게 해놓고 선거를 한다고 하는 것은 원천적인 부정선거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느냐 말이다. 10.20. 월 모든 대학이 오늘부터 아무 이유 없이 전부 휴강이라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발표하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는지 정말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젊은 학생들을 위하여 걱정이다. 10.23. 목 어제 국민투표가 있었다. 오늘 최종 발표를 보니 투표율 95.5%, 찬성 91.6%로 사상 최고라고 발표되었다. 이것을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한심스럽고 가소롭다. 왜 이렇게도 우리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가? 해도 정말 너무했다. 윤보선, 김종필, 유진오, 허정 등등이 투표를 했다고 신문에 났다. 나의 이름이 이들과 같이 신문에 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나님께 감사해야겠다. 10.27. 월 오늘은 신민당이 없어지는 날이다. 신민당과 나는 운명을 오늘까지 같이해 온 것이다. 창당의 중요한 역할을 한 나다. 윤보선씨를 대통령으로 밀면서 임시 대변인도 했었다. 민주당이 집권했을 적에 살림을 나누어 가질 때 신민당으로 출발했었다. 신민당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뻔했다. 김대중에게 대통령 후보 경쟁을 해서 1차에 이기고 2차에는 지기도 한 비통하고 기막힌 일도 당하였다. 총재 선거에 김대중이를 반대했다고 깡패들(김대중 지지자들)에게 시민회관 앞에서 맞아 죽을 뻔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매청까지 도망쳐서 간신히 살아난 일도 있다. 원내총무 시절에 개헌 파동 때 우리 집 옆에서 김형욱 정보부장이 보낸 괴한에 의하여 초산을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총재 시절에 대구 금호호텔에서 상이군경들에게 1층까지 포위되어 연금되는 비극도 맛보았다. 이철승이가 깡패를 약 50명 당사에 보내 11시간이나 점령되고 그때도 죽을 뻔했다. 당사에서 YH 사건이 생겨서 경찰에 의하여 목숨을 뺏길 뻔했다. 총재직 가처분, 국회의원직 제명,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많았다. 나의 생명처럼 생각했던 신민당, 나와 함께 국민 속에서 자라온 신민당. 비록 이들이 권력으로 폭력으로 신민당이라는 이름을 없앴지만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신민당의 이름으로 집권하지 못한 채 이대로 지나가다니 하늘도 무심하다. 11.5. 수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레이건이 압도적으로 카터를 누르고 당선됐다. 총투표수 52%밖에 안 되는 표에서 51%. 우리 국민 가운데 부러워하지 않는 국민이 있을까? 이 사람들 99% 투표에 99% 찬성이라는 조작극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국의 선거 52% 투표에 51%의 승리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늘 이 이야기를 해 왔다. 민주주의는 51%의 찬성이 100%의 찬성보다 더욱 위대하다고…. 11.12. 수 오늘은 한국의 역사에 또 하나의 영원히 기록될 엄청난 일을 한 날이다. 이 사람들이 정치활동 금지법을 만들어 나를 포함해서 811명을 금지시켰다. 나 자신은 이미 생각한 바이지마는 말단 당원까지 많이 포함되었다. 몇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번 명단에 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들 한다. 정치한다고 다니면서 811명이나 묶는데 거기에도 끼지 않는다면 부끄러워서 다닐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11.15. 토 오늘의 이 사람들이 또다시 국민과 온 세계가 놀랄 사실을 발표했다. 신문사를 몇 개 없애는 것과 민간 방송을 모두 없앤다는 내용이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언론의 탄압이 아니라 언론의 말살이다. 이러한 독재 체제를 언제까지 우리들은 구경을 해야 하는가? 11.30. 일 김대중이 문제로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의 디트로이트에서 한국으로 가는 물건을 하역하지 않겠다고 노동조합에서 선언했다. 독일 외상은 EEC 회원국이 앞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을 않기로 제의했으며 독일에서는 한국산 물건의 불매를 선언했다. 이 한심한 나라는 세계의 고아가 되어 어디로 가는 것인가? 12.11. 목 24시간을 어떻게 유익하게 보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나처럼 이렇게 1년이 가깝게 연금이 되어 있으니까. 나는 어떤 일을 가지고 24시간을 쪼개느냐? 아침에 일어나서 가벼운 운동을 한다. 아침을 먹는다. 붓글씨를 쓴다. 점심을 먹는다. 책을 이것저것 보면서 이런저런 심지어 어린 시절까지 생각한다. 3시 30분부터 4시 사이에 좁은 뜰에서 조깅을 25분간 한다. 모두 합쳐서 40분 내지 50분간 운동을 한다.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신문을 본다. 12시경에 자고 아침 7시경에 일어나는 것이 나의 하루다. 12.21. 일 내가 연금된 지가 만 7개월 하고 이틀이 지났다. 1980년도 10일이 지나면 다 지나간다. 80년도 한 해를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영광스러운 희망에 찬 신년과 봄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5·17의 쿠데타로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바뀌었다. 나는 연금되었다. 나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은 시작되었다. 나 자신에게 이기는 일을 나는 해내야만 했다. 12.31. 수 오늘은 1980년의 마지막 날이다. 금년 1년을 무엇이라고 표현할까? 독재자에 의해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만들어진 한 해다. 1981년은 온 국민이 바라는 평화와 사랑과 자유민주주의가 찾아오는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악한 해가 다시는 오지 않게 하시고 희망의 ‘서울의 봄’이 찾아드는 따스한 새해가 우리들을 기다리기를 빌 뿐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0~83년 가택 연금과 정치 활동 규제를 받던 기간 대학노트에 한글과 한자를 섞어 상당한 분량의 일기를 남겼습니다. 200자 원고지 800장에 해당합니다. 지면에는 ‘YS 가택 연금 일기’를 3회에 걸쳐 요약 소개합니다. 일기 전문은 원문 그대로 온라인 ‘조선멤버십’을 통해 매주 순차적으로 공개합니다. /정리=이한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