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작가 에밀 자둘이 쓴 동화책 <초고속 후다닥 뽀뽀> 첫 장에 적힌 글귀다. 이 동화의 주인공은 회사 출퇴근으로 늘 바쁜 아빠 토끼다. 그는 아기 토끼에게 뽀뽀를 한다. 하지만 언제나 '초고속 후다닥'이다. 계란 프라이를 하면서도, 휴대전화를 받으면서도, 신발을 신으면서도 아빠는 늘 급 인할인 하다. 결국 화가 난 아기 토끼는 이렇게 외친다. "오늘 우리 아빠 급행열차는 엄청 많이 늦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빠에게 뽀뽀를 퍼붓는다. 2018년 3쇄가 인쇄된 이 책은 단순한 동화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 내 일상 속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침에는 아빠 얼굴도 못 보고, 저녁엔 "아빠, 또 늦게 와?"가 우리 아들의 단 골드문컨설팅 골 멘트다. 동화 속 토끼 가족의 모습이 우리 집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은 처음으로 30%를 넘어섰다. 10년 전보다 무려 9배 늘어난 수치다. 변화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 10명 중 7명은 육아휴직을 쓰지 않는다. 왜일까? 인구보건복지협회 보고서(2 mmf원금 022)에 따르면,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쓰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직장 분위기"(47.5%)였다. 선배도, 상사도, 동료도 쓰지 않으니 내가 쓰는 게 어색하고 두려운 것이다. 육아휴직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4 고용노동부 발표 결과, 근로시간을 줄일 수 있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의 여성 사용률은 87.7%, 남성은 고작 12. 주택관리공단 3%였다. 2017년 이후 거의 변함없는 수치다. 숫자가 말해준다. 아빠들의 육아 참여는 늘고 있지만,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안 해봐서 모르는' 현실 그렇다면 아빠들의 육아 참여는 정말 필요할까?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어색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건, 단순하다. 다수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킹맘은 직접 경험으로 안다. 아이가 아픈 날,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다가올 때, 회사의 회의와 아이의 돌봄이 충돌할 때,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매일 부딪히며 배운다. 하지만 워킹대디는 여전히 소수라서, 경험치가 적다. 다수가 안 해봤으니 다수가 모른다. 인구보건복지협회 보고서를 보면 워킹대디의 평일 자녀 돌봄 시간은 1~3시간, 주말은 3~5시간에 그쳤다. 맞벌이 가구가 늘면서 공동양육이 절실해지고 있지만, 남성 육아지원 프로그램 인지도는 '전혀 모른다'가 57%였다. 교류하는 워킹대디가 '없다'는 응답도 72%였다.
즉, 아빠들의 육아는 '필요성을 알면서도 해본 적 없는 영역'인 셈이다. '안 해서 모르고, 몰라서 더 안 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 2024년 9월 4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4 경기도 양성평등주간 문화콘서트’에서 배우이자 작가인 봉태규씨가 육아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 경기도
"아빠가 되고 나서야 내가 고민하지 않던 수많은 문제를 알게 됐습니다."
작년 경기도 양성평등주간 문화콘서트 행사에서 배우 봉태규씨는 이렇게 말했다. 수족구로 인한 가정보육의 어려움, 양가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고로움, 어린이집·유치원·학교의 시간표가 제각각인 현실. 그는 육아를 해본 아빠였고, 그래서 '아는 아빠'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충격을 받았다. 나와 동등한 '어른'이자 같은 '부모'인 사람이, 내가 매일같이 부딪히는 고민을 똑같이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부모지만, '엄마'와 '아빠'라는 이름은 너무 다른 경험을 안겨주곤 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 사회에 봉태규 같은 아빠가 많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아빠의 육아는 기득권 내려놓는 일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쓴 나의 기사를 보고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저출생 시대의 정책과 문화를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당시 기자도 어린 딸을 키우는 아빠였다. 육아 제도에도 밝고 관심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취재가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서 안 쓰니까 쓰기가 쉽지 않네요. 여성은 육아휴직이 당연한데, 남성은 경쟁에서 밀린다는 인식이 강해요. 소수가 되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그의 말이 오래 남았다. 생각해 보면, 남성의 육아휴직은 단순한 '제도 사용'이 아니었다. 직장에서의 기득권, 혹은 미래의 기득권을 내려놓는 행위였다. 재직자는 기득권이지만, 휴직자는 소수다. 특히 남성 관리자들이 절대다수인 한국의 조직문화에서, 남성의 육아휴직은 곧 권력과 기회를 일부 포기하는 결정일 수 있다.
그래서 워킹대디들의 육아지원정책 사용률이 낮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 지난 2월 23일 시행된 육아지원 3법 개정안에 따라 육아휴직 기간이 부모별 1년 6개월씩 총 3년으로 확대되고 연장된 기간의 육아휴직 급여 또한 최대 160만 원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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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은 분명하다. 워킹맘이 있듯, 워킹대디도 똑같이 많다. 과거 워킹맘도 처음엔 몰라서 못 했고, 못 하니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워킹대디들이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뿐이다. 성별에 따른 문화와 인식의 벽은 여전히 높다. 그래서 아빠들의 변화는 더디고, 때로는 좌절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추는 앞으로 가야 한다. 느리더라도.
고용노동부는 아빠들을 위한 교육·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휴직 지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일과 육아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막막한 아빠들에게는 같은 처지의 워킹대디 멘토링이 절실하다. 직장과 가정에서의 경험을 나누는 작은 자리가, 결국 큰 변화를 만든다. 결국, 함께 가야 한다. 아빠의 육아 참여 확대는 단순히 저출생 문제 해결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로서의 권리이자 의무이고, 나아가 우리 사회가 약자와 소수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초고속 후다닥 뽀뽀만 남기고 떠나는 아빠 대신, 여유 있게 품에 안아줄 수 있는 아빠. 그런 아빠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의 시계추는 비로소 제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