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 백악관 인근에 있는 라피엣 광장의 모습. ‘백악관의 뒷마당’으로 불리는 이 광장에선 1981년부터 ‘백악관 평화 시위’가 열렸다. 하지만 9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시위의 심장부인 ‘파란 천막’ 등을 철거하라고 지시했고, 사진에서 보이듯 현재는 천막을 포함해 시위대의 물품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워싱턴=신진우 특파원 niceshin@donga.com
신진우 워싱턴 특파원
《“항상 보이던 천막이 없어져서 허전하네요.” 9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근처 라피엣(라파예트) 코스피지수 광장을 찾았다. 노점상 찰리 씨는 기자에게 손가락으로 바로 옆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란 천막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파란 천막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인 1981년 6월부터 시작된 미 역사상 최장기간 시위인 ‘백악관 평화 시위(White House Peace Vigil)’ 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당시 윌리엄 토머스라는골드몽 시민 활동가가 “지혜와 정직이 필요하다”는 팻말을 들고 핵무기 해체, 전쟁 반대 등을 외치면서 시작됐다.》 이후 7명의 대통령을 거쳐 올해까지 장장 44년간 시위가 계속됐다. 2009년 토머스 씨가 사망했음에도 그의 뜻을 기리는 시민들이 시위를 계속해 왔다. 자원봉사자들도 주 7일, 매일 24시간을 교대하며 이곳을 지켜 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 유망종목 시위는 수많은 세계 분쟁, 허리케인과 눈보라, 폭염, 홍수까지 모두 견뎌 왔다”고 논평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한마디에 44년의 평화 시위가 끝난 것이다.
● 백악관 “안전-미화 조치” 트럼프 대통령은 올 9월 7일 이 시위를 중단시키고 천막 등을 모조리 없앴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그는알라딘다운로드 “치워라. 오늘 치워라. 지금 당장 치워라(Take it down. Take it down today. Right now)”라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백악관 측은 파란 천막, 어지럽게 널려 있는 팻말 등이 이곳을 노숙자 캠프처럼 보이게 하는 탓에 주변 경관을 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일대를 방문하신규상장예정종목 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다른 곳에서도 치안 유지를 위해 노숙자 텐트촌을 철거했고 천막 등이 공원의 ‘미적 자원’을 훼손하는 만큼 철거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백악관 측의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 집회가 처음에는 반전, 반핵을 외쳤지만 트럼프 1기 행정부와 2기 행정부를 거치면서 노골적인 반(反)트럼프 집회로 변질됐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강경 보수 매체 ‘리얼 아메리카 보이스’의 브라이언 글렌 기자도 그중 한 명이다. AP통신에 따르면 글렌 기자는 대통령에게 “시위의 시작은 핵무기 반대였지만 이제 반미, 반트럼프 천막으로 변질됐다”고 알렸다. 이 말을 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줄 몰랐다”며 즉각 철거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글렌 기자는 올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정장을 입지 않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복장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노골적으로 면박을 줄 만큼 친(親)트럼프 성향이 강하다. 천막은 해체됐지만 대통령의 철거 명령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시민은 대통령이 평화 시위를 무리하게 없앴다며 그 자체로 시민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광장에서 만난 애덤 씨는 “시민들이 이 정도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게 ‘독재’가 아니고 뭐냐”고 되물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대통령의 인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행태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그간 시위대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 경찰이나 행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시위가 완전히 중단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WP는 “어떤 대통령도 시위 철거를 직접 명령한 적은 없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조치가 이례적이라고 논평했다. ● 트럼프 1기 때 BLM 시위 벌어져 라피엣 광장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한 미국,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지한 프랑스의 우정과 연대를 상징하는 장소다. ‘백악관의 뒷마당’으로 불리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전 세계 관광객이 북적이는 명소가 됐다. 이 광장은 집회·시위의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매년 낙태, 총기, 이민 등 다양한 의제에 관한 수백 건의 집회가 열린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도 이곳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020년 5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목조르기로 숨졌다. 이후 전국적으로 진상 규명, 인종차별 반대를 주장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적인 언행 등을 비판하는 시위가 열렸다. ‘BLM(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중요하다)’이라고 불린 이 시위는 트럼프 1기 행정부 내내 집권 세력의 고민거리였다. 올 4월에도 재집권한 트럼프 대통령이 반대파를 존중하지 않는다며 그를 비판하는 시위가 열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골치 아픈 장소임이 분명하다. 대통령의 시위 해체 명령에 반발하는 시민들은 “파란 천막은 노숙자 캠프가 아니다”라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천막에 침대 등 ‘노숙’을 위한 물건이 없는 데다 시위하는 이들 모두 각자 다른 곳에 거주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비, 눈, 바람을 피하거나 전단지 및 자료 등을 보관하기 위한 임시 구조물인데도 백악관 측이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워싱턴지부의 아서 스피처 선임 변호사는 당국의 철거 조치를 두고 “헌법적 권리가 침해되는 것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당국의 일방적인 철거가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를 명백히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법적 대응 또한 검토하고 있다. 2020년부터 이 시위를 지지해 온 또 다른 활동가 태라 바세피 씨는 WP에 “이곳은 평화와 사랑의 ‘사원’이었다”며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대의를 위해 헌신한 곳이었다고 강조했다. ● “대통령 지지” 시민도 많아 물론 “백악관 앞이 깨끗해져 보기 좋다”며 대통령의 행보를 지지한다는 시민도 많다. 라피엣 광장 인근에서 기념품을 파는 제임스 씨는 기자에게 “당신처럼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백악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는다”며 “낡은 천막은 사실 이곳에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그렇게 오래 시위를 했지만, 바뀐 게 뭐가 있느냐”고 꼬집었다.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관광 왔다는 파커 씨 역시 “이 좁은 공간에서 천막을 치고 시위를 하면 보기에 안 좋았을 것”이라며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는 것 역시 시민의 권리”라고 동조했다. 일각에선 이번 사태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꾸준히 논란이 된 ‘집회·표현의 자유 축소’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당국은 최근 백악관 주변은 물론이고 워싱턴 도심, 각종 연방기관 청사 인근 등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허가할 때 이전보다 대폭 강화된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특히 반정부 성향의 집회는 허가를 거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진우 워싱턴 특파원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