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의 이복 동생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지만 1544년 57세에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중종은 왕후가 셋이었지만 현재는 모두가 이별하여 이산가족이 된 기구한 사연이 있다. 반정(反正)으로 진성대군은 왕으로 즉위했으나 정통성이 없어 힘없는 왕이었다.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었으므로 단경왕후에게는 연산군은 고모부가 된다. 반정 후 신수근은 처단되었고, 죄인의 자식인 단경왕후는 궁에서 쫓겨나와 폐출되었다. 조강지처를 지키지 못한 나약한 중종이었다. 두 번째 부인 장경 다시사신예수 왕후 윤씨는 단경왕후가 폐출된 후 후궁으로 책봉되었다가 이듬해 왕비로 책봉된다. 그러나 중종 10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출산 6일 후, 2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경왕후의 능은 처음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자락에서 조성하였다. 하지만 조성 21년 후 김안로의 정적 제거용 모함으로 고양시 서삼릉으로 천릉 당하였다. 신하들에게 눌려 두 번째 부인의 묘를 원리금상환이란 파묘당하게 한 중종이었다.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힘을 가진 왕후였다. 500여 년 전 권력다툼을 위해 사생결단으로 맞붙었던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한 축인 소윤 윤원형의 누나이다.
중종이 승하하자 처음 간심에서 총호사 윤인경을 중심으로 양주(楊州), 광주(廣州)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한다. 의경세자의 경릉(敬陵) 청룡 밖과 희릉(禧陵)의 서쪽 지점이 쓸만하다고 하였지만, 새로운 왕인 인종과 대신들은 중종은 생전에 장경왕후릉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며 단가비교 대행 대왕[중종]의 의중에 따라 희릉 옆을 결정한다. 그리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중종은 장경왕후 능을 천릉할 당시 자기 자리를 미리 정한다.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544년 11월 25일자 기사를 보면 '새 희릉(禧陵)에 쓸 만한 곳이 있으니 세자도 알아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희릉 오른쪽 1백 50보 지점의 능성이에 동원이강릉 형태로 논쟁 없이 무난히 능을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중종의 정릉을 조성한 지 18년 후, 능을 성종의 선릉 부근인 지금의 자리로 천릉한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문정왕후가 장경왕후 능과 중종 능을 갈려놓으려 질투심과 봉은사 주지 승려 보우의 원찰(願刹)에 대한 탐욕심으로 풍수를 명분으로 천릉을 한 것이다. 세 번째 부인에 의해 자기 묘가 파묘 당한 중종이었다.
▲ 중종 정릉 전면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선릉 동쪽 언덕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천릉한다. 그러나 중종 능이 있는 정릉은 강남구 삼성동은 물론 능 주변 대치동, 개포동 일대는 비가 많이 오면 홍수 피해가 자주 있는 저지대이다. 특히 개포동 일대는 장마가 들면 한강 물이 범람하여 탄천과 양재천을 거슬러 이곳까지 밀려들었고 때로는 돛을 단 배도 들어왔다. 이런 이유로 밀물 마을이란 뜻으로 '밀미리' 마을이라고 불려 졌고, 이 큰물이 해마다 두 번 정도 밀려왔다고 하여 한자어로 '포이리(浦二里)'라고 불려지다가 현재 '개포동(開浦洞)'의 유래가 되었다. 선조실록 16권, 선조 15년 1582년 7월 16일 1번째 기사를 보면 장마철마다 강물이 넘쳐 정자각 섬돌 밑까지 들어와 재실(齋室)에서 배를 타고 왕래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매년 흙을 쌓는 보토(補土) 작업을 하였다. 결국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지아비 정릉 옆으로 가고자 했던 뜻을 접고, 상습 침수 터를 피해 현재 육군사관학교 인근 노원구 공릉동 태릉(泰陵)에 묻혔다. 문정왕후의 욕심이 남편 중종을 흉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서삼릉 중종이 묻혔던 터인 초장지는 후에 철종의 예릉으로 재사용한다.
▲ 물에 잠긴 가상 정릉 정자각. KBS 방송화면 캡쳐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하고 궁에서 폐출당하게 하였다.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는 죽어서 어렵게 만났지만,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에 의해 두 번째 부인인 장경왕후와 헤어지고 자신은 파묘를 당한다. 파묘 당한 후, 옮긴 자리는 장마철이면 물에 잠기고 침수당한다.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도 침수는 싫다며 떠나고 홀로 남겨진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기까지 한 중종의 정릉이다. 중종 왕실의 정릉과 세 왕후의 온릉, 희릉, 태릉은 가장 복잡하고 가장 속 시끄러운 조선왕릉이다. 온릉, 희릉, 태릉 이야기는 중종의 정릉에 이어 다음 회부터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 홍살문
정통성이 없어 반정 공신들에 휘둘려 바지 사장 아닌 바지 임금의 오명을 벗고 포부를 펼치기 위해 개혁의 아이콘 조광조를 중용하지만, 자신이 중용한 조광조도 믿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사사(賜死)한 우유부단한 중종이었다. 중종의 모습에서 우유부단함 때문에 아버지의 복수가 물거품이 되고,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왕자 햄릿을 연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