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끝은 칼로 무를 썰듯 간단 명쾌하지 않다. 변화의 시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맞부딪히고, 인상적인 이야기가 남는다. 우리는 원주의 영원산성과 영원사부터 시작했다. 이곳은 궁예가 뜻을 펼치기 위해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는 장소다. 긴박했던 당시와 달리 우리는 한가로운 금대캠핑장 빌라감정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올라갔다. 반란군과 캠핑장의 격차만큼이나 고된 산행이었다. 혼란기의 신라처럼 무더위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헉헉, 아빠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성을 쌓은 거야? 그냥 평지에 만들면 안 되나?""반란군이잖아. 산에 성을 만들어야 방어하기 쉬웠겠지.""왕한테 반항하면 다 죽지 않아? 궁예는 어떻게 왕이 됐지?""그만큼 신라가 엉망이었으니까. 궁예뿐만 아니라 견훤 같은 힘센 군인 세력이 전국 곳곳에서 들고일어났다고." 우회상장 지배층의 부패와 국가의 통제권 상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민심 악화와 전복. 신라 또한 망하는 나라의 보편적인 길을 걸었다. 초등학생 둘을 포함한 우리 가족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다가 몹시 당황했다. 텀블러 하나만 들고 허술하게 궁예의 이동을 따라간 것이다. 궁예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였다. 그런데 어떻게 병장기를 들고 사람을 죽이고 다녔을까. 상당한 체력과 근력을 갖추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승려 시절의 궁예를 이렇게 평한다. "계율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 담기(膽氣)가 있었다."
담기, 그러니까 궁예는 용기와 배짱이 두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 병의 물을 네 가족이 조금씩 나눠 마시며 거친 숨을 몰아 쉬던 무렵, 고개를 들자 단아한 사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상대사가 영원산성의 수호사찰로 창건한 영원사(永遠寺)였다.
▲ 지치고 힘들때 등장한 영원사. 감로수와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던 보살님의 초코파이 선물.
ⓒ 이준수
영원산성과 영원사, 반란군과 승려의 교차점
"아빠, 절에는 물 나오지?""맞다! 샘물 있잖아. 잘 됐다. 얼른 가자."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던 우리는 샘물을 찾아 걸음을 바삐 옮겼다. 과연 대웅전이 자리한 너른 마당 한편에 감로수가 솟아올랐다. 졸졸졸 흐르는 가는 물줄기가 아니라 콸콸 쏟아지는 옥수였다. 우리는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허기진 배를 물로라도 채워야 했다. 그때였다. "어린아이들이 용케도 걸어서 여기까지 왔네. 이모가 간식이라도 줄게.""가... 감사합니다." 땀에 절어 몰골을 하고 있던 우리 가족을 보고서 한 신도님이 초코파이 네 개를 챙겨주셨다. 거듭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허겁지겁 과자를 먹었다. 빈속에 먹는 파이는 극락정토의 맛이었다. 우리 눈에 그분은 미륵보살처럼 보였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여겼어. 자신이 미래의 부처이므로 본인을 따르면 혼탁한 세상이 끝난다고 했지. 실제로 초반에는 백성들이 열광하기도 했고.""사기꾼 아니야? 어떻게 사람들이 홀랑 빠졌지?""방금 우리도 경험했잖아. 승복을 입은 분이 대가 없이 자비를 베풀자 마음이 스르르 열렸잖아. 궁예도 승려 출신이라 믿음의 힘을 잘 알았다고."
영원사에서 영원산성까지는 지도 앱으로 50분 거리. 나와 아내는 갈길을 서둘렀지만 식사 때를 한참 놓친 두 초등학생은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우리는 영혼이 나가버린 아이들을 강제로 영원산성까지 오르게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돌아내려 왔다. 우리가 궁예 같다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지점까지는 잘 왔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처음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궁예의 영광은 왕건에게로 넘어간다.
▲ 왕건은 자신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 장군에게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이준수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목을 내준 장군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왕위에 앉힌 핵심 인물 네 명이 있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4인의 장군이다. 우리 가족이 찾아간 곳은 춘천시 서면에 위치한 신숭겸 장군의 묘다. 정확한 명칭은 '장절공신숭겸장군묘역'. 묘지라 하니 왠지 적막할 것 같지만 느낌이 상당히 좋고, 규모도 웅장하다. 웬만한 왕릉보다 훨씬 멋있다. 봉분은 낙락장송이 늘어선 언덕에 있다. 저절로 마음이 벅차오르는 기세가 있다. 언덕에 오르자 소양강이 흐르는 춘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까보다 더 큰 놀라움의 숨소리가 터진다. 괜히 한국 8대 명당으로 꼽히는 자리가 아니다. 아무리 고려의 개국공신이라고는 하나 왕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대접받는 이유가 뭘까. 나는 헉헉 거리며 봉분까지 오른 딸들에게 퀴즈를 냈다. "왜 신숭겸 장군의 무덤은 세 개 일까?""(봉분을 요리조리 보더니) 옛날에 유행했겠지.""땡, 어디에 묻혔는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세 개 만들면 너무 힘들지 않아?""신숭겸 장군의 머리가 황금으로 되어 있었거든!" 밝은 노란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신숭겸 장군을 상상해 버린 아이들은 경악했다. 농담이 아니다. 진짜 황금으로 된 머리를 묻었다. 그런데 황금 머리에는 숙연해지는 사연이 존재한다. 927년, 대구 공산성에서 후백제군과 싸우던 왕건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한다. 골짜기에 갇혀 죽을 운명에 처한 왕건을 대신해 신숭겸이 왕의 복장을 하고 적을 유인한다.
후백제군이 위장한 신숭겸을 사로잡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왕건은 겨우 전장에서 몸을 빼낸다. 신숭겸 장군은 중과부적으로 목이 잘리고 만다. 전투가 끝난 후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한 왕건은 도선국사가 명당이라 점지해 준 자신의 묫자리로 향한다. 그리고는 황금으로 장군의 머리를 만들어 시신과 함께 묻는다. 물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두 개의 가묘를 설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천하 8대 명당에 자리 잡은 신장절공묘(신숭겸장군묘). 세 봉분 중 어느 곳에 장군은 묻혀 있을까?
ⓒ 이준수
신숭겸 묘에서 느껴지는 충성의 의미
왕의 묫자리에 황금 머리까지 붙여 장례를 치러주는데 어느 신하가 충성을 바치지 않을까. 신숭겸 장군을 숭배하는 문화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도포서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치고 왕을 구할 수 있지?""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왕건이 신숭겸 장군에게 직접 '장절공(壯絶公)'이라는 시호까지 내릴 정도였으니까.""왕건에게 신숭겸 장군이 있었으니까 신라가 망할 만하네." 신숭겸장군묘역에서 나오려는 길에 우연히 평산 신씨 종친회 관계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은 신숭겸 장군을 '우리 할아버지'라 불렀고, 신사임당을 '우리 할머니'라 칭했다.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분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음력 3월 3일에는 춘향제를, 음력 9월 9일에는 추향제를 지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사이 젊은 커플 한 쌍이 데이트 차림으로 봉분이 있는 언덕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신라도 사라지고, 고려도 사라졌지만 신숭겸 장군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었다. 항복한 왕의 유골은 경기도에, 영혼은 강원도에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처지인 신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최후의 1인까지 처절하게 저항했을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머릿속에 신라의 비장한 최후가 안 떠오르지 않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백제의 패망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계백 장군과 황산벌 전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은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포용과 통합을 강조했던 왕건은 경순왕을 우대하며 받아들였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섞이듯 부드러운 그림이었다.
경순왕은 태자보다도 높은 지위를 누리며 일생을 보냈다. 그렇지만 세상을 떠난 후 고향 경주에 묻히지는 못했다.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있다. 하지만 강원도 원주에도 경천묘가 있다. 실제 무덤은 없지만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 미륵산 자락에 위치한 경천묘는 주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 한국관광공사
신라의 최후를 듣던 딸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경순왕은 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거야?""승산이 없어 보여서 그랬대. 싸워봤자 백성들만 죽을 테니까. 신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큰 피해 없이 지키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겠지.""그래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잖아. 관창 같은 화랑 없어?"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은 마의태자가 세워준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의 아들로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달리 마의태자는 항복을 반대했다. 삼국사기에 마의태자의 처절한 피울음이 남아있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아버지와 신하들의 뜻을 꺾는데 실패한 마의태자는 궁을 떠난다. 이후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 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기구한 운명의 왕자에게는 숱한 전설이 남는 법. 오대산 소금강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식당암'이라 불리는 대형 너럭바위가 나온다. 바위 상부가 상당히 넓다. 백 명이 앉아도 너끈하다. 식당암에는 마의태자가 군사를 훈련시키고 밥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를 듣고서 식당암을 살펴보면 과연 '유오산수'하며 심신단련하기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확연히 든다. "신라가 망한다고 해서 백성들이 다 죽은 건 아니네. 나는 나라가 망하면 다 죽는 줄 알았어.""살아남은 사람들은 새 나라의 백성으로 바뀌는 거지.""그럼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니네.""망한 나라는 그럴 이유가 있더라고. 새 나라도 이유가 있고." 우리가 신라와 고려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는 동안 식당암 아래 계곡물이 무심히 흘렀다. 크고 작은 나라가 세워지고 사라져 가는 동안 식당암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지질활동의 주기에 비추어 보면 인간의 역사란 얼마나 짧고 덧없는가. 문득 대한민국은 지금쯤 어떤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먼 훗날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평가가 내려질까. 꽤 운이 좋은 시절을 보냈다고 부러워할까, 피곤한 시대를 살았다고 안쓰러워할까. 식당암 바위가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