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박정숙(1917~2020) 할머니 5주기가 다음달 2일입니다. 할머니는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대포초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1949년 12월 경기도 광주에서 여성운동을 하다 체포된 뒤 1950년 1월에 풀려났습니다. 7월부터는 서울시여성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52년 2월 육군 특무대(방첩사령부의 전신)에 체포되어 서울지구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와 전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8년 옥고를 치른 뒤 1960년 10월3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습니다. 할머니는 전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 중 다른 재소자로부 해약환급금 터 어머니(고 주명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출소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운영하던 서울 신촌 진달래양장점으로 찾아와 그날부터 가게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5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에 의해 최백근(1914~61) 선생님이 연행된 날, 할머니와 어머니는 혁신계인 사회대중당 활동과는 무관하게 서울 중부경찰서로 제일은행인터넷뱅킹 연행되었고 1961년 12월21일 최백근 선생님이 형장의 이슬로 운명하던 날에야 혁명검찰부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서울 종로와 서대문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다가 1975년 8월에 치안본부(경찰청 전신)가 날조·조작한 이른바 ‘오작교’ 사건으로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구속되었고 2년형을 선고받아 만기 출소하였습니다.2005년 대 신혼전세자금대출 법원장으로 취임한 이용훈은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를 그냥 접어두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라며 독재 정부의 간첩 조작 사건 등에 대해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했습니다. 2022년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오작교 사건’에 대해 재심을 권고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라 재심을 청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52 한국장학재단 생활비대출 신청 년 여성동맹 활동하다 8년 옥고 1975년 ‘오작교’ 조작 사건으로 2년 출소 뒤 전국의 양심수들 옥바라지 기초수급비 아껴 영치금으로 전달 4번에 걸친 체포와 수감 생활을 통해 통일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양심수들의 고초를 체험한 할머니는 자신의 안락을 바라지 않고 여러 양심수를 옥바라지하는 등 인권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현대스위스 저축은행 70살을 넘겨 노동 능력을 상실한 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었음에도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구속된 양심수에 대한 영치금 전달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1991년부터는 그토록 염원한 조국통일을 살아생전에 보고 싶다며 범민련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할머니의 헌신적인 양심수 후원과 통일운동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2001년 조계종 불교인권위원회는 할머니에게 불교인권상을 수여했습니다. 아흔살이 되어서도 나라 곳곳 교도소에 갇힌 양심수들을 면회하기 위해 기차와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2015년 노환으로 댁에서 생활하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모셔야 했지만 2020년 10월2일 운명하시는 날까지도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던 양심수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할머니를 찾아주었습니다. 유품으로 간직해 온 할머니의 통장 내역을 최근 확인하니 돌아가신 뒤에도 몇몇 사회단체 후원금으로 빠져나간 것을 보고 순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아서는 최고령 양심수였지만 자신보다 더 어린 통일인사들을 앞세우며 드러내기를 경계하셨던 할머니의 자세는 인간이 지녀야 할 품성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1945년 민족 분단으로 인해 북쪽에 거주하고 있던 언니를 뵙지 못해 늘 그리워하셨는데 이제는 하늘나라에서나마 해후하여 자매가 그토록 염원한 조국통일을 논하며 더 이상 헤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겠지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남과 북의 형제자매조차 서로 왕래할 수 없는 이 비극적인 분단 고통을 미래 통일세대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할머니 살아생전 그토록 희망하셨던 조국통일을 안겨드리지 못해 거듭 죄송함을 느끼며 할머니 5주기를 맞이하여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추모의 글을 윤경이가 올립니다. 박윤경/성균관대 대학원 예술대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