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디저트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크렘 브륄레를 생각하면 나는 맛보다도 소리를 떠올린다. 티스푼으로 톡 하고 표면을 두들겼을 때 파삭 하고 깨지는 얇은 설탕 코팅의 사운드. 달달하고 말캉한 커스터드 크림 맛도 근사하지만, 토치로 노릇노릇 태운 캐러멜 층을 깨뜨리는 쾌감이 왜 그리 좋은지.
대화에서도 그런 지점을 좋아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여린 이유리 마음을 보호하며 경계하던 사람이 일시에 장벽을 무너뜨리고 마음을 열게 되는 순간, 크렘 브륄레가 깨질 때와 비슷한 쾌감이 느껴진다. 이 순간은 가끔 음성으로 이루어진 효과음이 날 때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한 번도 누구한테 말해본 적은 없지만” 등의 형태를 갖춰서.
무엇보다도 이런 소 예대금리차 리는 아주 조용할 때 주로 들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설탕 부서지는 소리야 워낙 작아서 침묵 속에서나 들리는 소리인 게 당연하지만, 의외로 대화에서 마음이 열리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무슨 독촉을 하거나 주문을 외우듯 세뇌를 시킨다고 진심이 나오는 게 아니다.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며 경청하고, 고요함 속에 인내심을 가질 때 비로소 들을 수 있 대학교졸업후취업 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여는 소리를, 나는 아주 좋아한다. 상대가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이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마치 아주 어린 아이들처럼.
범계역 카페브루더에서 파 한국장학재단등록가능한상품이존재하지않습니다 사삭 설탕 코팅을 깨뜨린 크렘 브륄레. 직각으로 예쁘게 깨져주어서 사진 찍기 좋았다. 달달하고 양도 넉넉하다.
대학생 때 모 일간지가 주관하는 멘토링 캠프에 참여한 적이 있다. 특정 대학의 학생들 수십여 명이 멘토(라고 하지만 거의 과외 선생님)가 되어 약 150여명의 초·중 특수관계자 학생들과 2주간 함께 생활하는 시스템이었다. 방학 동안 용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덥석 받아들였는데, 함정이었다. 왜 깨달음은 설레발 뒤에야 찾아오는지.
대규모 집단을 이룬 아이들이 지닌 순수성은 양날의 검이다. 순수해서 더 본능적이고, 사회성은 부족하고, 무엇보다 모이면 정말 지긋지긋하게 말을 안 듣는다. 너무 우스워 보이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그렇다고 엄격하게만 굴면 마음을 닫아 어떤 교육적 의도도 먹히지 않는다. 그 사이 어딘가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노련함을 갖추기에는, 내가 아직 스물한 살이었다.
아니 다 떠나서 거기 모인 소위 ‘대학생 교사’들에게 어떤 교육적 사명이 있었겠는가. 가르쳐야 한다는 아이들과 비교해서 나이도 많으면 8살, 심지어 적으면 5살 정도나 차이 날까. 나이 차이가 작아서 더 유리할 것 같다면 그 또한 오산이다. 어린 악마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기 싸움이 교사 노릇에 가장 힘들다는 걸 그땐 몰랐다.
그나마도 숨통이 트이던 건 매일 밤 찾아오는 ‘멘토링 시간’이었다. 제 에너지에 흥분해 날뛰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대화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불을 어둡게 하고 차분하게 모여 앉아 잔잔한 이야기로 포문을 여는 것이다. 아이들은 침묵은 싫어하지만 어둠은 재밌어한다. 그들이 눈을 반짝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나는 매우 치사하게 “평소에 엄마, 아빠에게 혼날 때 뭐가 가장 속상하냐”는 이간질(?) 류의 질문으로 관심을 끌었다.
치밀하게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이런 접근법은 말하자면 크렘 브륄레의 설탕막을 쉽게 깰 수 있는 트리거가 됐다. 성인에게 하면 비웃음을 살 귀여운 질문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결코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절반인 부모에 대해 공식적인 반발심 선언을 해야 하는 아이들은 자못 심각해진다. 말을 고르고 골라 고발이라도 하듯 뱉어내다 보면 눈물도 같이 흘린다. 왠지 그땐 침착해야 하는 나도 덩달아 울컥하곤 했다.
사실 요지만 따지면 “엄마가 동생만 예뻐하고 나는 신경을 안 써준다”, “아무리 공부가 힘들다고 해도 학원을 줄여주지 않는다”는 정도의 내용이긴 한데, 그게 또 저마다의 어린 음성과 사정에 이입하며 들으면 너무 절절하다. 그 나잇대의 세계에 부모님의 관심이나 하루하루의 학습 스케줄만큼 삶의 스트레스 여부를 결정하는 게 또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는 않는 이야기들, 본인에겐 그보다 더 무거울 수 없는 고민 꾸러미들을 누군가 들어주려는 시늉을 하자마자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하는 거다.
토치를 사다 직장 선배의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은 크렘 브륄레. 쏟아붓는 재료의 양과 노력에 비해 결과물의 양이 적지만, 맛은 매우 좋아서 해먹어보는 건 추천. 그릇이 토치에 조금 그을린 건 비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만든 장막이라는 건, 별수 없이 그리 단단하지가 않다. 크렘 브륄레 마냥 설탕 굳혀서 막아놓은 수준이라 가끔은 아주 작은 진정성만으로도 무장 해제된다. 오히려 어려운 쪽은 진심을 갖추고 상대방의 여린 내면을 들여다보겠다고 마음먹는 일인 것 같다. 요즘엔 특히 누군가의 심연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설탕막으로 가려놨으니 어련히 단단하게 잘 지낼 거라고 믿거나, 적절히 회피하는 게 쉬운 일이다. 하지만 감히 그 내심을 파고들어 갈 시도를 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변화를 목도하기도 한다.
캠프의 마지막 날엔 내가 맡은 아이들의 부모에게 통지표를 쓰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이가 캠프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학습 태도는 어떻게 보완해주시면 좋을지 등. 사실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밤늦도록 울면서 썼다는 건 기억이 난다. 쓰는 내내 멘토링 시간 때 짓던 아이들의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그 학부모들은 내가 쓴 편지를 보고 조금 웃었을 것 같다. 새벽의 감수성 속에서 글을 쓴데다, 겨우 2주 남짓 봐놓고 아이들을 전부 안다는 듯 구구절절 호소 같은 내용을 썼던 것 같으니까. 지금도 그 편지를 생각하면 얼굴이 홧홧해지지만, 후회스럽진 않다. 캠프를 마치며 아이들이 삼삼오오 페이지를 채워 선물해준 노트에는 “엄마한테는 말도 못하던 이야기를 선생님한테는 할 수 있어서 너무 속이 시원했어요. 돌아가면 엄마한테도 꼭 솔직하게 얘기해볼게요.”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생님으로 불렸던 기간, 몸으로 부딪히고 같이 울어줘야 마음을 열던 아이들의 설탕 막을 깼던 방법을 지금도 가끔 어려운 취재원을 대할 때 생각한다.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달콤한 설탕 코팅만 간신히 핥는 게 아니라, 그걸 깨내어 안까지 푹 파고들어 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설탕막이 딱딱해서가 아니라 그 안의 여린 속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보통은 포기하고 돌아가지만, 장벽을 넘으려고 하는 행위는 돌이켜보면 늘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지금쯤이면 그들도 모두 직장인이 됐거나 취업 준비 중인 나이가 됐을 테다. 기억 속의 그들은 너무 앳되기만 해서, 성장한 모습이 쉬이 그려지진 않는다. 이제는 좀 덜 떠들고, 더 어른스럽고, 부모님 앞에서 하고 싶은 말도 어엿하게 피력하는 어른이 됐을까. 궁금하지만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꼰대’처럼 옛이야기나 늘어놓고 싶진 않다. 아, 밥을 사 주고 싶기는 하다. 한때의 그들과 너무나 닮아있다고 말하며 디저트도 사줄 수 있다면 좋겠다. 겉으로 보기엔 굳은 캐러멜 층이 만들어져 있지만, 살짝만 두드려도 금세 순수한 속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맛있는 크렘 브륄레를.
오늘 잉크는 초콜릿은?
술을 못 해서 디저트로 2차를 가는 것을 선호하는 김지은 기자가 늘어놓는 가벼운 수다 같은 에세이입니다. 팍팍한 일상에 지치셨나요? 김 기자가 풀어내는 달콤한 이야기를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https://www.hani.co.kr/arti/SERIES/3318?h=s)에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