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기업보다 DB하이텍이 발 빠르게 화합물반도체에 대한 투자를 늘릴 수 있던 이유는 웨이퍼 삼성홈플러스 의 크기에 있었다. 현재 실리콘반도체 생산업체는 대부분 12인치 웨이퍼를 사용한다. 반면 화합물반도체는 8인치 웨이퍼가 주류다. 웨이퍼의 크기에 따라 생산설비가 달라진다. 12인치 웨이퍼를 사용하던 회사가 화합물반도체 산업에 도전하려면 8인치 웨이퍼를 쓰는 생산설비를 추가로 들여놓아야 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대기업은 대부분 12인치 웨이퍼 설비를 갖췄다. 반면 DB하이텍은 8인치 웨이퍼 설비가 주를 이룬다.
반도체 업계에 12인치 웨이퍼 설비 투자가 진행되던 2010년 중후반, DB하이텍은 12인치 웨이퍼 설비 투자를 일부 포기했다. 대신 8인치 웨이퍼에서 더 고성능의 반도체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후 전력 및 디스플레이 시스템반도체를 만들며 시장의 숨은 강자로 자리 잡았다. 화합물반도체도 8인치 웨이퍼를 사용하는 만큼 DB하이텍은 다른 기업보다는 쉽게 화합물반도체 시장에 도전장을 낼 수 있었다. DB하이텍은 지난해 12월 'DB하이텍 경영혁신 계획'을 발표하면서 4000억 원을 투자해, 2026년까지 GaN 전력반도체 월 생산능력을 1만 장까지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이외에도 SiC 전력반도체 시장 진출을 위해 같은 기간 7000억 원을 투자하고, 2030년까지 월 2만 장의 반도체 생산능력을 갖추겠다는 목표도 공유했다. 올해부터는 GaN 전력반도체 시제품 생산에 돌입했다. SiC 전력반도체는 내년 말 양산을 목표로 개발하고 있다.
적재적소에 화합물반도체 투입해야 유럽의 인피니온, 미국의 온세미컨덕터 등 글로벌 시장에서 화합물반도체 시장점유율 1위를 다투는 기업들은 대부분 GaN과 SiC 화합물반도체를 함께 개발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두 소재를 함께 다루는 업체가 드물다. 두 화합물반도체의 생산장비가 일부 다르기 때문이다. 화합물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다른 생산장비를 모두 사들여야 하니 SiC와 GaN에 전부 투자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밝혔다.
어려운 투자임에도 이를 감행한 이유를 듣기 위해 8월 26일 경기 부천시의 DB하이텍 본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심천만 DB하이텍 상무(전략마케팅팀장)는 "가장 효율적인 솔루션을 만들기 위해 실리콘반도체는 물론 SiC, GaN 등 화합물반도체 생산시설을 함께 갖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 상무는 인피니온에서 만든 자료를 하나 꺼냈다. 화합물 전력반도체의 효율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SiC 전력반도체와 GaN 전력반도체, 그리고 실리콘반도체를 적재적소에 사용해야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다.
심천만 DB하이텍 상무가 화합물반도체 생산시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전기차로 예를 들자면 상대적으로 고전압을 버틸 수 있는 SiC 전력반도체는 차량 구동부에 사용하고, 차량 내부 화면이나 헤드라이트 등 등화류에 전력을 공급하는 일은 GaN 전력반도체에 맡긴다. 마지막으로 차량 내부 장치의 전력을 세부 조정하는 일은 실리콘반도체가 맡는다. 이처럼 여러 반도체를 함께 사용해야 전력 이용량을 가장 효율화할 수 있다. 자료에는 이렇게 여러 반도체를 사용할 경우 전기차의 이동 가능 거리가 최대 11%가량 늘어난다고 적혀 있었다.
심 상무는 "전력반도체를 효율화하려면 결국 SiC, GaN은 물론이고 실리콘반도체도 다룰 줄 아는 업체가 필요하다"며 "DB하이텍은 화합물반도체와 실리콘반도체를 함께 사용해 가장 효율적 답안을 제시하는 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또 화합물반도체 투자 규모도 효율화했다고 설명했다. 투자 규모가 크긴 하지만 새로운 팹을 짓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심 상무는 "실리콘, SiC, GaN 공정에 모두 쓰이는 장비도 있어 공정을 최대한 효율화하는 방식으로 설비투자를 진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화합물반도체 공급망 국산화 시급 직접 공장을 짓는 대신 화합물반도체를 잘하는 기업을 인수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DB하이텍은 직접 생산시설을 구축했다. 심 상무는 "화합물반도체는 세계 각국이 기술 유출을 철저히 통제하는 품목"이라며 "잘하는 해외 업체를 인수해도 그 기술을 국내로 들여오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그만큼 한국에 화합물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설계부터 웨이퍼, 파운드리 등 화합물반도체 제작 전반을 순수 국내 기술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심 상무는 "해외에서 화합물반도체 핵심 소재 공급을 끊어버린다면 한국에서 화합물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다"며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육성에 나서 화합물반도체 자체 공급망을 갖춰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는 화합물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차호영 홍익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화합물반도체 국산 부품 우선 구매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차 교수는 "화합물반도체 부품 국산화에 성공해도 이를 쓰는 국내 기업이 많지 않다"며 "정부 지원을 통해서라도 국산 부품 사용을 늘려 초기 화합물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지원하고 이를 발판으로 자생적 산업구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