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 자연이라는 것을 잊고 산다. 인간은 명백히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플라스틱 문명 아래 우리는 자연을 인간과 분리된 무한한 자원인 것처럼 깎아내고 파헤치 마이크레딧 1등급 고 뽑아내며 이용하고 있다. 정은혜는 이렇듯 우리가 잊고지낸 자연과의 연결을 표현하고 경험케 하는 것을 '생태 예술'로 정의한다.
"자연은 늘 좋아했어요. 청소년기 캐나다에 이민 가서 우울하고 좋지 않았을 때도 자연으로 향했어요. 외롭고 답답하고 힘들다가도 자연에 가면 괜찮아지는 거예요. 혼자 있는 건 무서운데 숲에 혼자 있는 건 무섭지 않고, 겁도 많은데 바닷물에 떠 있는 건 괜찮더라고요. 자연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경험이죠. 자연과 연결된 감각을 느낄 때 괜찮아지는 거예요. 저의 경험으로부터 생태 예술을 시작한 거예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 조천읍에 터를 잡은 이유도 생태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는 곶자왈이라는 신비로운 원시림 숲이 있고, 푸르게 철썩이는 함덕 서우봉 바다가 가까이 있었다. 자연 속에서 개인적인 치유는 물론 미술치료사로 활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연과의 연결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예술 활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제주의 숲과 바다에서 만난 것은 경이로운 감동만은 아니었다. 2010년 처음 제주에 왔을 때와 달리 곶자왈의 습지들은 서서히 말라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고, 함덕 서우봉 바다는 물 색깔이 변했으며 지형이 달라지고 있었다. 마치 영원할 것 같던 북극의 만년빙이 녹아 사라지듯이. 자연과 연결된 인간이 스스로 망쳐버린 자연을 마주했을 때 어땠을까? 플라스틱 만다라, 우리가 고통을 마주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몰랐다. 다만 함덕 서우봉 바다의 푸른 물결과 하얀 백사장이 좋아 자주 바다 수영을 했다. 하지만 오래 머물수록 기후 위기의 징표들이 보였다. 눈에 띄는 쓰레기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러던 2020년경 똑같은 모양의 흰색 플라스틱 알갱이를 대량으로 발견했다. 모래도, 조개도, 산호도 아니었다. 무엇이었을까? 주변에도 아는 이가 없었다.
조사해 보니 '플라스틱 펠릿(Pellet, 압축해 만든 작은 조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5mm 크기의 이 작은 알갱이는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원료였다. 먼바다에서 일어난 선박사고로 유출되었거나 다른 지역 플라스틱 공장에서 배출된 것이 해류나 빗물을 타고 왔을 가능성이 컸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제주 바다와 어울리지 않는 물질인 것만은 확실했다. 정은혜는 펠릿을 비롯한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술치료의 한 방법으로 숲에서 했던 만다라 만들기를 접목해 '플라스틱 만다라' 작업을 시작했다.
▲ 함덕 서우봉 바다에서 주운 하얀 플라스틱 펠릿과 작은 조각들
ⓒ 변정정희
드넓은 백사장에 엎드려 모래를 헤집는다. 처음 한 명인가 싶었던 사람이 둘 셋 늘어난다. 연결된 이들이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엉금엉금 기어다닌다. 옷 속으로 깔깔한 모래알들이 스며든다. 간혹 파도가 치고 짠 바닷물에 젖으면 깔깔깔 웃음소리가 퍼지기도 한다. 파라솔을 펴고 누운 사람들과 수영하는 사람들 사이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플라스틱을 체에 걸러가며 줍는다.
작업실로 돌아와 모은 조각을 색깔별로 분류한다. 다시금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엎드려 플라스틱 조각을 하나하나 수놓듯이 내려놓는다. 사방이 고요해진다. 서서히 만다라가 그려질수록 바다를 생각하는 마음이 공간을 채운다. 그 마음은 고통이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오랜 시간 거대한 만다라를 만들었을 때, 다시 흩어버린다. 비로소 플라스틱 만다라가 완성되었다. 이 작품의 영감이 된 티베트 불교의 모래 만다라도 그렇다. 색을 입힌 모래로 몇 달에 걸쳐 정성껏 만든 만다라를 마지막 기도와 함께 모두 쓸어 모아 한 잔에 담아 강에 흘려보낸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모래가 축복이 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만물에 스민다고 믿는다. 플라스틱 만다라에서는 플라스틱 조각을 고통으로 여기며 바다로부터 거둬들여 자연을 축복한다고 믿는다. 축복의 모래를 자연으로 보내듯이 역으로 고통의 플라스틱을 자연에서 거두는 것이다. 정은혜는 이를 자연에 전하는 '한 줌의 축복'이라고 말했다. 분명 아름다운 예술이다. 하지만 고작 한 줌의 플라스틱을 줍는 것으로 감히 광활한 바다를 축복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별거 아니죠. 쓰레기를 이만큼 많이 버리는데 줍는 건 요만큼 한 줌이에요. 뭘 대단한 걸 했다는 느낌이 없어요. 그래서 하찮아요. 그렇지만 축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죠. 물론 그 마음도 하찮아요. 플라스틱 만다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쓰레기일 뿐이에요." 생태 예술의 한 분야로 '업사이클 아트(Upcycle Art, 새활용 예술)'가 있다. 쓰레기를 되살려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하찮은 쓰레기가 예술을 입고 가치 있고 귀한 작품으로 거듭난다. 어차피 버려질 것들을 되살리는 것은 기후 위기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업사이클로 인해 마치 쓰레기가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플라스틱 만다라는 정반대 지점에 있다. 작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플라스틱이 쓰레기임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서 죄책감을 거두지 않는다. 미술치료의 관점에 따르면 죄책감과 수치심은 다른 감정이다. 죄책감은 '나의 행동이 잘못됐다'라는 것이고, 수치심은 '나의 존재가 잘못됐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면 책임감을 갖고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지만, 수치심을 느끼면 자존감이 떨어져 문제로부터 숨거나 도망가며 회피한다. 기후 위기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온몸으로 기후 위기를 느끼고 있지만 모르는 척 무관심으로 회피하며 단절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초래한 고통은 여전히 그 바다에 있다. 미운 벌레 인형 만들기, 혐오를 호기심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단절하다 보면 어느새 자연은 낯설고 더럽고 불편한 것이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숲과 바다는 잘 닦인 산책로이거나 안전한 해수욕장, 혹은 카페 창밖 너머로 마주했을 풍경일 것이다. 여기에 더 이질적인 자연이 등장하면 어떨까? 우리는 '유해' 딱지를 붙이고 혐오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흔히 러브버그로 부르는 붉은등우단털파리가 갑자기 등장했을 때, 어떻게 지금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생명인지 호기심을 갖기보다는 먼저 방제하려고 했다. 숲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온갖 생명이 느껴진다. 울창한 나무와 풀이 바람에 잎사귀를 비비는 소리는 물론이고 여러 새와 곤충의 소리가 가득하다. 싱그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모기는 윙윙거리며 맴돌고 개미는 살갗을 기어오른다. 이름 모를 낯선 벌레에 물어뜯겨 몸이 간지럽다.
각자 싫어하는 벌레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고른 미운 벌레 사진을 찾아 그림으로 그린다. 아무리 혐오하는 벌레라도 그림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오래 바라봐야 한다.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해진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로 무는지, 어느 부위에서 독이 나오는지, 어떤 부분이 미운지, 혹시 예쁜 부분이 없는지 살핀다. 겨우 완성한 벌레 그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그림을 가지고 천으로 인형을 만든다. 제법 귀엽다. '미운 벌레 인형 만들기'다.
▲ 어린이 참가자들이 직접 만든 다양한 미운 벌레 인형
ⓒ 에코오롯
"바퀴벌레 만들기 같은 거 했어요. 장난 아니었죠. 죄송하기도 했어요. 비행기 타고 오신 분들도 계셨거든요. 귀여운 애벌레 정도를 생각하셨는데, 싫어하는 벌레를 '똑같이 그리세요' 하니 머리를 싸매는 사람도 있고, 막 울렁거린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긴장이 쫙 올라가는 게 느껴졌어요. 그렇지만 그걸 하는 거예요. 예술이 아니었으면 혐오하는 벌레를 그렇게 오랫동안 쳐다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리다 보면 괜찮아져요."
미운 벌레 인형 만들기 참가자 중 한 명은 생태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싶지만 유독 쥐만은 공포스럽게 느꼈다. 그는 자신이 쥐를 혐오한다는 사실이 무척 괴롭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쥐 사진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리고 인형으로 만들었다. 생태 예술의 한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물론 그 뒤로 쥐가 예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눈감지 않고 끝까지 보았다고 전했다. 한 번의 생태 예술 활동으로 자연과의 연결이 갑자기 회복되지는 않는다. 그 회복이 모든 벌레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니다. 여전히 벌레가 싫고 미울 수 있지만, 예술을 통해서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자연과 마주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혐오에서 호기심으로 가는 발자국을 떼는 일이다. 제주산호뜨개, 따로 또 같이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보통 예술은 작가 혼자 작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해 모두의 작품을 만드는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 공동체 기반 예술)'도 있다. 모든 생태 예술이 커뮤니티 아트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기후 위기가 모두의 문제인 것만큼 생태 예술에 어울리는 방식 중 하나이다. 정은혜 역시 연결된 이들과 더불어 '에코오롯'이라는 이름의 팀을 만들어 커뮤니티 아트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지난해 여름 여러 사람이 모여 코바늘로 함께 산호 모양을 뜨는 '제주산호뜨개'에서였다. 이는 2005년 호주 출신 마가렛·크리스틴 워트하임 자매 작가가 시작한 '크로셰 산호초(Crochet Coral Reef, 코바늘 산호초) 프로젝트'에서 영감받은 것으로, 정은혜는 제주 바닷속에서 직접 만난 산호를 시민들과 함께 뜨기로 했다. 산호를 마주한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제주 서귀포 앞바다로 풍덩 들어간다. 산호의 생김새와 색깔, 형질, 사는 환경에 관해 이야기한다. 산호는 모양과 색이 저마다 각양각색이고, 폴립이 모여 군체를 이루며 따로 또 같이 군락을 형성해 협업하며 공생한다. 또한 동물로 분류되나 식물과 광물의 형질도 갖고 있다. 인간이 산호를 쉽게 규정할 수 없듯 산호 뜨개도 도안이나 규칙 없이 자유롭게 뜬다. 처음 코바늘을 잡은 사람도 문제없고, 오랫동안 뜨개질을 해 온 사람도 상관없다. 뜨개질의 기본 단위인 코 수를 세면서 머리 아프게 짤 필요가 없다. 코를 늘이거나 줄이거나 빼먹어도 괜찮고, 중간에 뜨는 방법을 바꿔도 괜찮고, 혼자 뜨다가 같이 떠도 괜찮다. 오히려 더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떠야 바닷속 구불구불한 산호 모양에 가까워진다. 자연이 그러하듯이. 언제 시작했는지 끝났는지 모르게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뜨개질하다 보니 꼬불꼬불 제주산호뜨개가 완성되었다.
"함께 뭔가 이렇게 '짠!'하고 만들어질 때 너무 아름다워요. 전시가 하이라이트는 아니에요. 사람들과 마음이 '탁!' 모여서 뭔가를 '착!'할 때 그 경험이 너무 짜릿하고 재미있어요. 그래서 계속하는 것 같아요."
▲ 여럿이 함께 제주산호뜨개를 하는 프로젝트 참가자들
ⓒ 변정정희
예술가라면 누구나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여럿이 작업하다 보면 개개인의 미적 감각이나 숙련도에 따라 프로젝트를 주도한 작가가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정은혜 역시 플라스틱 조각의 위치를 바꿔 더 아름답게 만다라를 매만지고 싶고, 뜨개 코를 손질해 좀 더 살아있는 산호처럼 연출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실제로 그렇게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커뮤니티 아트를 하는 이유는 혼자 예술을 하는 것과 여럿이 함께 예술을 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고통을 마주하거나 혐오를 넘어서는 일이 어렵고 우울하게 느껴지지만, 함께할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기후 위기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바꿔나갈 만한 힘이 생긴다. 연대감이다. 산호가 공생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예술은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모은다.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일어서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기후 위기 앞에서 예술을 계속하는 이유 여전히 고민이 남는다. 고통을 마주하고, 혐오를 호기심으로 바꾸고, 여럿이 함께해도 예술을 창작하고 전시하고 향유하는 일에는 탄소가 배출되고 쓰레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빙하가 녹고 있다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일부러 북극으로 가 빙하를 잘라 녹지 않게 포장해 대도시로 가져오는 일은 친환경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해도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 작품 운송과 포장뿐 아니라 전시 설치도 마찬가지이다. 나무와 철골을 이용해 임시 벽을 세우고 페인트를 칠하고 조명을 달고 장식한다. 홍보를 위해 수많은 포스터와 안내서를 인쇄한다. 이 모든 것이 한 번의 전시를 위해 하는 일이며, 이 쓰레기들은 재활용하기 어렵다.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경우 2022년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전시당 10톤가량의 관련 폐기물이 발생했다. 최근 정은혜 역시 플라스틱 만다라 전시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왔다. 전시용 특수 포장을 하는 대신 비닐봉지에 플라스틱 조각을 담아 가져갔다. 임시 벽을 세우지 않았으며 최소한의 장식을 했다. 제주산호뜨개를 할 때도 실을 풀어 재활용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플라스틱이 들어간 아크릴실이 아닌 면실을 써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미술보다 적을지 몰라도 쓰레기는 나온다. 여전히 탄소도 배출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는 예술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이번 오스트리아 전시를 하면서 '그래도 해야 한다'라고 느꼈어요. 작품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더라고요. 온라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플라스틱의 실체를 만져보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거든요.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면서 '내가 사는 곳이자 매일 수영하는 바다에서 직접 주운 것'이라는 실체를 전달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아직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순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기도 하다. 똑같은 용도의 물건이라도 예술적 가치가 더해지면 훨씬 비싼 값에 사고 팔리고, 아무 쓸모가 없더라도 순수예술로 인정받으면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싼 값어치를 갖게 된다. 미술시장, 그림 재테크, 예술 산업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이런 분위기에서 요즘 '생태'는 소위 예술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아이템이다. 작가가 어떤 소신을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들던 시장에 나가는 순간 포장되고 덧칠되어 예술 상품이 되고야 만다.
"저는 생태 예술이라고 치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기후 위기에 관한 스토리를 말하는 작업이 많지, 실체에 대한 작업은 많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작업의 스토리는 '지구를 살리자'이지만 아이디어만 그렇고 실체는 땅에 닿지 않고 바다에 닿지 않는 작업이 너무 많아요. 실체를 파괴하면서 스토리만 입히는 예술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요. 제가 하고 싶은 생태 예술은 실체와 스토리가 하나거든요.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해요."
▲ 제주 바닷가에 놓인 ‘제주산호뜨개’
ⓒ 에코오롯
▲ 북촌 돌하르방 미술관에 전시된 ‘플라스틱 만다라’
ⓒ 에코오롯
여름은 계속해서 더 뜨거워지고, 폭우와 폭설, 태풍과 가뭄은 더 거칠게 몰아친다.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 앞에서 예술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극지의 빙하를 지킬 수 없고, 바다의 플라스틱을 없앨 수 없고, 죽은 산호를 되살릴 수 없다. 쓸모를 최선을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용한 예술 대신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과학은 이상기후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을까? 더 풍요로워지고 있는 자본은 기후 재난을 막아낼 수 있을까? 기후 위기 시계는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빨리 흐르고 있다. 최선을 다해 예측하고 막아서지만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절실하게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동굴 벽화를 그려가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예술을 해온 이유일 것이다. 미래에도 예술은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술을 해야 할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예술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우리가 보다 잘 살아가고자 삶을 꾸리는 일은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태 예술가 정은혜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볼 때 '우리 삶의 패턴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생각하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것은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필자 소개] 변정정희: 다큐멘터리와 라디오 방송 작가로 활동했으며, 최근 르포르타주 작업을 하며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 <작가 노동 선언>,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를 함께 썼습니다. 덧붙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