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은 131년 전 역사적 사건이다. 어찌 보면 깊은 과거사이다. 하지만 역사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동학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동학항쟁 30년 후 1924년 암태도소작쟁의가 일어났다. 암태도의 끌텅에 동학이 있었다. 동학교도들은 한말의병으로, 독립군으로, 소작쟁의로 진화해 나갔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뿌리에 동학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해방의 달, 동학을 통해 역사정의를 다시 생각해 본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무장 항쟁은 당대에 '동학란'(東學亂)이었다, 동학 교도들은 '동비'(東匪)로 불렸다. 해방 후에도 여전했다. 1949년 중등사회과 '우리나라의 역사' pdf 통합 편에 '동학란'으로 처음 기술됐다. 1970년 인문계고 역사 교과서에 이르러서야 '동학혁명'으로 수정되었다. 동학 항쟁은 1970년대 동학혁명운동,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 1990년대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교과서에 서술된다. 2004년 3월5일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규정돼 있다. 아 국가장학금 신청 직도 혁명과 운동 사이에서 헤맨다. 동학 항쟁이 당대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도 '난'(亂)으로 갇히면서 전남지역에는 토벌군을 추앙하고 위무하는 다양한 기념조형물이 세워졌다. 장성 황룡, 나주, 장흥 등 전남 서남부 지역에 전공비가 다시 들어섰다. #중앙군 직접 진압 나선 장성 황룡전투 조정은 1894년봄 군미필대학생학자금대출 동학 세력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자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다. 초토사 홍계훈은 대관 이학승에게 기마병 등 300명을 내주며 동학 토벌 선봉대 임무를 부여했다.1894년 4월 23일(음력) 이학승은 장성 황룡강변에서 동학군을 기습 공격했다. 동학군은 장태를 엄폐물로 삼아 관군 진영으로 돌진해 대관 이학승과 경군 5명을 사살하며 크게 승리했다. 정자제공 1897년, 장성 황룡전투 후 3년이 흘렀다. 장성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황룡에서 숨진 이학승 추도비 건립 논의가 일었다. 노사 기정진이 앞장섰고, 장성 유력 씨족들이 기금을 모았다. 비문은 유림 거두 면암 최익현이 작성했다.
비석은 높이 160㎝, 두께 23㎝, 폭 65㎝에 21행 43자를 음각으로 새겼다. 비석 앞면에 '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라 썼다. 이학승은 또 3년이 지난 1900년 9월, 서울 장충단에 배향됐다. 장충단은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성한 추모공간이었다.이학승은 전사 후 무관에도 불구하고 좌승지로 추증됐고, 전사지에는 순의비가, 그의 위패는 국가 공식 추모공간인 장충단에 배향됐으니, 당대에는 틀림없는 승리자였다. 이학승 순의비가 건립된 지 128년이 지난 오늘 순의비는 과수원 밭에 초라하게 서 있다. 비석은 퇴색해 글자를 읽을 수 없고, 주변은 폐비닐과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다. 찾는 이도, 그를 추모하는 발걸음도 없다. # 나주 목사 민종렬의 수성記 '금성토평비' 전남 서남부 동학 농민군 3천여 명은 1894년 7월 5일 나주 서성문 공격에 나선다. 나무목사 민종렬은 결사 항전했다. 수성군의 우세한 무기와 잘 훈련된 병력, 지휘관의 리더십에 동학군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고 만다. 이후에도 동학군은 수차례 나주 공략에 나서지만 연전 연패했다.
동학군은 2차 봉기 후 10월 20일 손화중과 오권선 연합부대 1만 3천 명으로 다시 나주성을 공격했다. 선봉대가 광주 외곽의 침산에서 수성군과 일전을 치렀지만, 또다시 패퇴했다.나주 유림들은 동비를 막은 수성군의 공적을 찬양했다. 금성관 입구에 서 있는 '금성토평비' (錦城討平碑)가 그 기념물이다.
나주 금성토평비
비문은 송사 기우만이 짓고 글씨는 송재회가 써서 1895년에 세웠다. 본래 나주목 동헌 정문인 정수루 앞에 있었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다. 그러다 1976년 나주 군청이 있던 금성관 내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비문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다."처음으로 적과 무안에서 싸워 여춘이 머리를 바치고, 두 번째 싸움으로 나주 서문에서는 최경선이 밤중에 도망가고, 세 번째는 사창에서 이겨 그 근거지를 불태우고 네 번째 싸움으로 용진산에서 오권선이 몸만 겨우 빼내었고, 다섯 번째 고막 싸움에서는 패해 죽은 사람들이 들판에 가득하였고, 여섯 번째 나주 남산 싸움에서는 기세만 보고도 스스로 무너졌다."
나주지역 시민단체는 동학을 토벌한 공적비가 과연 나주시의 랜드마크인 금성관에 버젓이 서 있는 게 타당하냐고 주장한다.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가 들어 있는 비각
# 장흥성 공략과 갑오동란 장졸 순절비 동학 주력군은 1894년 11월초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실상 해산의 길에 들었다. 전봉준 세력을 따라 북상하지 않은 전남 동학군들은 12월 초 장흥으로 모여들었다. 1만에서 3만 명에 육박했다. 장흥 연합부대는 12월 4일 장흥 벽사역에 이어 5일 장흥도호부 장녕성을 공략했다. 박헌양 부사와 장졸 96명은 끝까지 저항했다. 동학군은 장흥부사 박헌양을 체포, 처형했다. 강진 전라병영성을 점령했던 동학군은 12월 12일 장흥으로 귀환, 남문 밖과 모정 뒷산에 진을 쳤다. 경군, 일본군, 장흥 수성군, 민보군 등 진압연합군과 전남서남부 동학군 3만여 명이 장흥에서 맞붙었다. 동학 농민군은 개활지인 석대들로 나와 장흥도호부를 압박해 나갔다. 최신식 소총과 미국제 기관총에 동학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동학군은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였지만, 끝내 패배하고 만다. 동학난이 진압된 뒤 숨진 관군을 기리는 여러 상징화 작업이 진행됐다. 서울서 내려온 양호순무영의 우선봉장 이두황은 이들의 순절을 기려 포상을 베풀고, 1898년 전라도 어사 이승욱은 장흥성 북문 밖에 순절단을 조성했다. 이어 1899년 기우만이 수성군 장졸을 기리는 비문을 짓고 순절단 옆에 '광서20년 갑오동학란 수성장졸 순절비'를 세웠다. 광서(光緖)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로, 1894년을 뜻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순절비와 순절단을 장흥 남산공원 기슭으로 옮기면서 영회당도 건립했다.영회당은 장녕성 전투에서 전사한 박헌양 부사와 장졸을 기리는 사당이다. '영회당사집' 기록을 보면, '순무사 이도재가 장흥에 왔다가 이 일을 듣고, 그 사당의 이름을 영회당(永懷堂)이라고 이름하고 그 계에 부조도 하였다. 어사 이승욱(李承旭)도 그들을 위해 시(詩)를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한때 장흥 유림과 고관들이 고개를 숙이던 영회당도 순절비처럼 찾은 이가 드문 듯하다. 이제 동학은 난에서 농민혁명으로 명명되고, 진압군 기념물 대신에 동학농민군의 역사조형물이 남도 땅에 하나 둘 들어서 있다. 1992년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세워졌고, 2004년에는 동학 특별법이 제정됐다. 2015년에는 '장흥 동학혁명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 사이 순의비, 토평비, 순절비, 영회당은 녹슬고, 쇠락했다. 2019년에는 황토현 전승일인 5월11일을 국가 지정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제정, 선포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봉건체제를 개혁하고, 일제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거대한 혁명이었음을 공인했다. 수풀 더미에 묻힌 순의비와 순절비, 푸른 하늘로 비상하는 동학기념탑은 오늘, 다시 역사 정의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