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이 도시를 너무 좋아해요. 하지만 요즘은 일부러 골목길로만 다녀요. 중국인이 너무 많아졌거든요. 어디서든 중국어가 들려요. 제가 도망쳐 나온 이유가 이건데...”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 인근 카페에서 만난 전직 중국인 기업 간부 카오(가명)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1년 반 전 자녀들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을 당시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중산층 중국인들이 일본을 본격적 이주지로 삼기 전이었고, 부쿄(文京)구 부동산을 홍보하는 중국 SNS ‘샤오홍수(小紅書)’ 인플루언서들도 드물었다. 하지만 2024년 들어 카오가 사는 국민카드 할부수수료 아파트 단지에는 중국인 세대가 급증했다. 그는 다시 ‘중국인이 적은 동네’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도 ‘런리(潤日)’라 불리는 새로운 중국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의 일원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런리는 ‘중산층 중국인의 일본행’ 현상을 가리킨다. 이들은 영주권과 사업을 동시에 노리는 경우도 있고, 귀국 의사가 전혀 없는 이들도 있 농협 담보대출 다. 상하이 등 대도시에서는 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얼마나 머물 생각이냐”는 질문이 사실상 ‘비자 얘기’의 암호가 됐다. 현지 결혼, 아파트 구입, 부모 초청, 자금 반출 등 이주 관련 대화가 모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게 FT의 전언이다. 도쿄에 거주하는 언론인 장제핑은 “중국인의 지난 30년 사고방식은 ‘떠나는 카드론이란 게 더 낫다’였다”며 “시골을 떠나 도시로, 도시를 떠나 대도시로, 대도시에서 미국으로… 이제는 도쿄로 향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런리들은 공통적으로 재산과 교육에 대한 집착, 도쿄 부동산 투자, 알파드(도요타 대형 밴) 보유 욕구를 보인다. 부유층은 아자부·아오야마·아카사카 등 ‘3A’ 고급 지역을 선호하고, 중산층은 교육 인프라가 신한은행 공인인증센터 강한 부쿄구에 집중한다.
일본 사회·경제 흔드는 ‘런리’
일본 도쿄 시부야역 앞에 있는 하치코 동상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EPA]
최근 통계 세계 자동차 순위 에 따르면 일본 내 외국인 거주자는 35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3%에 육박한다. 이 중 10%가 중국인이다. 내년이면 중국계 인구만 100만명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FT는 이 거대한 물결이 일본의 인구 구조, 사회, 정치 지형까지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상하이 출신 제임스(가명)는 “예전에는 다들 미국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가지 않는다. 트럼프도, 시진핑도 싫기 때문”이라며 “도쿄가 제2의 삶을 위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선전 출신 IT 엔지니어 역시 “팬데믹을 통해 더 이상 중산층을 보호하지 않는 중국의 민낯을 보았다”며 일본행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인 러시는 도쿄 부동산 가격도 끌어올리고 있다. 고급 아파트의 20%가 중국인 명의로 거래되고, 2020년 도쿄올림픽 선수촌 단지 역시 중국인 매수가 대거 몰렸다. 부동산 중개업체 관계자 구오는 “중국 내 부동산 폭락을 겪은 이들이 도쿄를 ‘안전한 투자처’로 본다”며 “한 달에 200건 이상 문의가 온다”고 밝혔다. 문제는 자금 반출이다. 공식 루트를 피하려는 수요가 늘면서 거대한 지하 금융망이 형성됐다. 위안화를 아프리카 무역 네트워크 등을 거쳐 세탁한 뒤 일본 엔화 현금으로 받는 방식이다. 구오는 “100만달러 환전도 하루 만에 가능하다. 고객 상당수는 중국 관료 가족”이라고 전했다.
중국인 지식인들도 몰려…中 비평서점 곳곳에
런리 중에는 기업가뿐 아니라 학자·언론인 등 지식인도 많다. 도쿄 짐보초에는 중국 비평서점을 비롯해 ‘망명 서점’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곳에서는 중국 내 검열로 출판 불가능한 서적들이 팔리고, 세미나·토론 공간도 운영된다. 언론인 출신 장제핑은 “지식인들의 도쿄행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라며 “혁명을 꿈꾸는 건 아니지만, 도쿄가 중국 지식인들의 집결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반체제 인사 역시 “중국 경찰에 쫓기다 일본에 와 처음으로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며 도쿄를 ‘안식처’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