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한국에 온 ‘김정은 금고지기’의 사위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리대사. 사진 출처=RFA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리대사는 2019년 탈북하기 전까지 16년 동안 장인인 전일춘 노동당 39호실 실장 집에서 살았다. 사실상 왕조 국가인 북한에서 누구도 처벌할 수 없는 김정은 패밀리를 ‘신계(神界)’에 비유한다면, 그 아래 ‘인간계’ 최고위급들이 사는 곳이 그가 살던 은덕촌이다.
그의 아랫집에는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2015년 12
바다이야기비밀코드 월 사망)이, 윗집에는 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로동당 작전부장(2023년 2월 사망)이 살았다. 윗윗집에는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2010년 3월 총살)이 살았다.
1998년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 대동강구역 대동강 근처에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으쓱한 곳에 건설된 은덕촌은 10세대짜리 아파트 6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아파
골드몽릴게임 트 한 동마다 입구가 서로 반대 방향인 현관 두 개가 있다. 한 현관으로 5세대가 드나든다고 할 수 있다.
3m 높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은덕촌 입주 세대주는 60명. 김정일이 직접 골랐다. 군부에서 40명, 노동당에서 10명, 기타 행정기관에서 10명이 뽑혔다.
군부가 가장 많은 이유는 아무래도 총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바다이야기 쿠데타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총정치국장, 인민무력상, 총참모장뿐만 아니라 정찰국장, 조직부 국장 같은 부처 책임자급 장성들이 여기에서 산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 시대에도 이 입주 비율은 달라지지 않았다.
위성에서 본 평양시와 은덕촌(작은 사진·빨간 동그라
릴게임온라인 미). 한 동에 10세대가 사는 6동짜리 아파트가 북한 핵심 고위급이 사는 은덕촌이다(큰 사진). 구글어스 캡처.
● ‘인간계’ 최고위직들의 청빈 경쟁
이곳에 살면 북한에서 인간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이 보장된다. 북한군 1개 중대가 경비를 서는 방 다섯 개 197㎡(60평
바다이야기무료 )짜리 집에서 산다.
아파트 현관마다 경비병들이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은덕촌에 살면서도 다른 동과의 교류는 불가능하다. 같은 동에서도 현관이 다른 다섯 세대와는 소통이 거의 없다. 그나마 같은 현관을 이용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다섯 세대끼리는 서로 인사하고 지낸다.
드나드는 사람과 물자가 다 통제되다 보니, 은덕촌 사람들은 사치스럽게 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집에 비싼 물품을 들여놓거나 색다르게 꾸미거나 하면 다 보고가 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살던 류 전 대사 기억으로는 아래층 살던 대남 정책 총책 김양건의 집은 서 발 막대기를 휘둘러도 걸릴 것이 없었고, 대외 정책 총책 김계관은 그보다 더 심해 꽃제비가 따로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은덕촌 사람들은 청빈을 증명하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살아야 오래 살 수 있었다.
물론 이 ‘청빈한’ 관료들을 위해 김 씨 가문은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게 만들어 주는 크나큰 은덕을 베푼다.
은덕촌 가정은 부부만 사는 경우가 거의 없고 자식과 손자들까지 산다. 한 세대에 보통 5명 이상이 사는데 이들은 100% 입쌀로 배급을 받다. 반찬 몇 가지 정도는 할 수 있는 채소도 공급해 준다. 각 가정에 매달 달걀 30알, 돼지고기 2kg, 생선 2kg이 공급된다. 이 정도면 북한에선 인간계가 받을 수 있는 최고 대접이 분명하다.
조용한 환경에서 도청도 잘 되다 보니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말하는 습관도 은덕촌이 빚어낸 풍경이다. 도청에 걸려 처형된 이영호 북한군 총참모장(2012년 7월 처형)이나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이 돼 공개 처형된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처럼 이곳에서 살다가 죽임을 당하는 생생한 표본들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에, 늘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도 은덕촌이 만든 또 하나의 ‘혜택’이다.
은덕촌도 가끔 정전되긴 한다. 그래도 인간계 최고위직 노인들이 목욕은 하라고 세대마다 2kW짜리 가열기 하나씩은 넣어 주었다. 류 전 대사 부인은 한국에 온 뒤 수도에서 더운물, 찬물이 나오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류 씨는 남쪽에 와서 국민임대아파트에 산다. 국민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제일 좋은 주거 단지 은덕촌을 보며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싶다.
은덕촌 주변 위성사진. 빨간 동그라미 두 개는 김정일이 자주 파티를 열던 문수초대소이며 파란 동그라미가 은덕촌이다. 노란 동그라미는 도태촌이다. 김정일은 주변에 사는 고위급 인물들을 문수초대소로 불러 수시로 난잡한 술 파티를 열었다. 구글어스 캡처
● 은덕촌에서 도태촌으로
은덕촌 사람들에게 베푸는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여기에서 살다가 은퇴하면 은덕촌 담장 바로 바깥에 있는, 또 다른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로 옮겨 간다. 은덕촌 사람들은 이 아파트 단지를 ‘도태촌’이라고 부른다.
은덕촌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비밀이 절대 새 나가면 안 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은퇴해서도 사회에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
2019년 류 전 대사가 탈북하던 시점에 도태촌에 살던 사람들은 현직에 있을 때 한국에 특사로 왔던 김기남 노동당 선전비서, 현철해 차수, 최영림 총리, 김원홍 보위상,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등이다.
전일춘 실장도 류 전 대사가 탈북하기 전에 39호실 실장에서 물러나 도태촌으로 옮겼다. 집에 이불장과 옷장은 없어도 최신형 도청기만은 집안 곳곳에 숨겨져 있다. 도태촌도 직계 가족만 출입이 허용될 뿐 친척은 밖에 나와서 만나야 한다. 은퇴한 당사자가 죽으면 그제야 남은 가족은 평양 시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 있다.
도태가 되면 은덕촌에서 받던 배급이나 달걀 공급은 끊어진다. 전 실장도 도태촌에 옮겨 가선 부부의 6개월 치 배급으로 감자 4kg만 받았다. 2019년은 고난의 행군 시절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 기간도 아니었음에도 사정이 그랬다.
탈북 직전 류 전 대사 아내는 도태촌으로 옮겨간 아버지 집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27년 동안 39호실 수장으로 있으며 수천만~수억 달러를 주무르던 부친이 반년 치 배급으로 감자 2kg을 받으며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내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남들이 보는 눈도 있는데 이불장이랑 옷장을 사자.”
“돈이 어디 있냐?”
“엄마. 아버지가 39호실 실장이었는데 우리 집에 돈이 없다면 그걸 누가 믿겠어. 딸인 나도 못 믿겠는데.”
“내가 딸에게 거짓말을 해서 뭘 하겠니. 아버지가 비리를 저지르며 사리사욕을 채웠다면 오늘까지 그 자리에 붙어 있었겠니?”
해외에서 그나마 달러를 만져 본 아내는 부모에게 옷장과 이불장을 사라며 수중의 돈을 탈탈 털어 건넸다. 오던 길에 아내는 길가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김 씨 일가는 북한 곳곳에 수십 개의 호화 별장을 짓고 온갖 사치를 다 누리고 있는 동안,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최고 머슴들 삶의 마지막은 이처럼 비참했다.
류현우 전 대사가 지난달 말 출간한 저서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
●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
류 전 대사는 한국에 온 탈북민 중 유일하게 인간계 최고위급과 함께 은덕촌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김정일 금고지기의 사위였기에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극하기 전에 벌써 장인과 함께 김정은을 만나 이야기도 해 봤고, 김여정과 그의 남편도 만날 수 있었다. 북한 최고위층 패밀리로 이러저러한 일을 수많이 보고 들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았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달 전 그는 큰 결심을 했다. 자신이 보고 들었던 내용을 소상히 기록한 첫 저서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를 세상에 내놓았다.
김정일 패밀리 일원이던 이한영(1997년 피살)이 1996년에 쓴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과 이 씨 모친인 성혜랑이 2000년 펴낸 자서전 ‘등나무집’ 이후, 김 씨 패밀리에 대해 이렇게 자세한 증언이 담긴 책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한영의 저서와 류 전 대사의 저서는 모두 동아일보에서 출판했다.
북한 고위급 외교관의 시선과 김정일의 남산고급중학교 동창으로 나중에 금고지기가 된 전일춘 실장의 시각, 아내의 증언까지 합쳐진 이 책은 외부에서 절대 알 수 없는, 김정은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관심이 있거나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지 않고선 오늘의 북한을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령 책 내용 중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이 화형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류 전 대사가 탈북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은은 장성택을 불 태워 죽였다고 측근들에게 과시하듯 이야기했다. 장성택 숙청 이유나 숙청 과정도 책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는 남쪽 사람들에겐 ‘문이 열린 진실의 금고’ 역할을 오랫동안 할 것이다.
2021년 2월 미국 CNN 방송과 인터뷰하는 류현우 전 대사. CNN 캡처.
● 유일한 선택지가 된 탈북
류 전 대사 부부 탈북은 김정은에겐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은 뼈아픈 사건이겠지만, 그들을 한국으로 오게 만든 것은 김 씨 일가라고 할 수 있다.
류 전 대사의 탈북은 2017년 주 쿠웨이트 북한대사관에 걸어 놓은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선전화 한 점이 사라지면서 시작됐다. 그해 유엔에서 강력한 대북 제재가 의결되자 쿠웨이트 정부도 이에 맞춰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를 포함해 대사관 정원 10명 중 6명을 추방했다. 그 결과 대사관 참사였던 최고참 류 씨가 대리대사 및 초급당비서가 됐다.
인원이 줄어들자 북한 당국은 작은 건물로 이사해 대사관 임대료를 아끼라고 지시했다. 이사가 끝난 뒤 최종 점검을 하다 대사관에 있던 김 씨 가문 얼굴이 들어간 선전화 3점 중 한 점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됐다.
작품 중심에 선 김정일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고 그 아래에서 김정일을 에워싼 노동자, 농민, 군인들이 손가락 방향을 바라보는 유화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폐쇄회로(CC)TV도 돌려보고 인부들에게 물어도 보고 왔던 길과 쓰레기통도 뒤졌지만 사라진 그림은 나타나지 않았다.
1등서기관인 동료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상의하면서 류 전 대사는 “해당 선전화는 전직 초급당비서가 갖고 온 것이라 노동당 선전선동부 등록대장에 기재돼 있지 않은 것이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입을 닫고 있자”고 했다. 2년 뒤인 2019년 7월 1등서기관은 귀국했다.
북한 외교관들은 귀국 후 3개월 동안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는다. 그해 8월 북한에서 전보가 날아왔다. 대사관 ‘1호 작품’, 즉 김 씨 일가가 들어 있는 유화를 가지고 귀국하라는 것. 다른 나라에 파견된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봤지만 해당 지시가 떨어진 사람은 류 전 대사 한 명뿐이었다. 귀국한 1등서기관이 2년 전 선전화 분실 사실을 고백하고 책임을 그에게 돌린 것이다.
그까짓 선전화 한 점이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북한에선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당의 유일적 영도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에는 ‘초상화, 동상, 영상 작품… 등을 목숨으로 보위해야 한다’고 돼 있다.
목숨으로 보위해야 할 작품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그 사실을 이실직고하지 않고 2년이나 숨긴 죄는 당을 기만한 용서하지 못할 대역죄다. 귀국하라는 날은 닥쳐오고 있었지만, 류 전 대사와 아내는 살아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내는 “우리가 그래도 충신 집안인데, 아버지가 김정은에게 편지를 쓰면 살 수 있지 않을까”라며 희망을 피력했지만 확률은 희박했다. 그들이 살면서 본 노동당은 부친은 용서해도 자식까진 용서하지 않았다. 10대 원칙 사수에는 하나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북한이다.
북한에 귀국해서 정치범수용소에 갈 바엔 여기서 죽자고 결심도 했지만 10대 딸이 눈에 밟혀 할 수 없었다. 정치범의 딸이 돼 평생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류 전 대사는 잘 알았다.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이 총살되고 그 남은 가족은 발길질을 당하며 통곡 속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귀국할 수도, 자결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내몰린 이들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망명이었다. 북한 영화 ‘은비녀’의 주제곡이 귀에 맴돌았다. ‘새 삶의 1절’이 시작됐다.
외로이 떠가는 운명의 쪽배키 없이 노 없이 가는 곳 어데냐풍랑에 시달려 고달픈 마음나라 잃어 서러워라아 내 인생아
류현우 전 대사가 분실한 선전화와 비슷한 컨셉트의 선전화. 이 선전화엔 김정일 얼굴만 나오지만, 그가 분실한 선전화 속 김정일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류현우 전 대사 제공.
● 대사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북에 남은 가족들 때문에 처음엔 미국으로 조용히 망명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런데 하필 그때는 2019년 9월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와 베트남,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얼싸안고 그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던 때였다. 미국으로 갔다가 김정은에게 주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남은 선택지는 한국이었다. 외국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1990년대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 외교관이 출연한 유튜브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외교관은 “한국에 오면 집도 주고 직업도 주고 이밥에 돼지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 북한 외교관이 망명하면 한국 정부에서 먹고 살게 다 해 준다”고 말했다.
류 전 대사 생각에도 그럴 것 같긴 했다. 한국으로 가자고 결심했다. 남편과 딸이냐, 북한의 부모냐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아내도 어디든 절대 못 간다고 고집을 부리다 마지막 순간 결국 자식을 선택했다.
2019년 9월 18일 오전 6시반. 뜬눈으로 새운 부부는 학교에 가야 할 시간이라며 딸을 깨워 차에 태우고 15분 거리의 한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혹시 말실수할까 봐 딸에겐 그때까지 탈북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에 도착했고 그해 12월 사회에 나왔다. 한국에 오면 먹고 살 걱정이 없다던 선배 외교관의 말은 사실과 달랐다. 적어도 류 전 대사에게 특혜 같은 것은 없었다. 다른 탈북민처럼 56㎡(17평) 임대주택에 짐을 풀고 똑같은 액수의 정착금을 받았다. 한숨을 돌릴까 했는데 그만 한 달 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직업도 없는데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3인 가족이 월 110만 원을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게 됐다. 관리비와 통신비 등을 내고 나면 40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택배기사로 나섰지만 50세 된 탈북민을 받아주는 회사도 없었다. 북한에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외교관이었지만 한국에 와서 백수가 된 것이다.
몇몇 유명 탈북 외교관은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이 되기도 했지만 북한 외교관 출신 연구원 정원도 한정돼 있다 보니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겐 자리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방송도 출연하게 됐고 이러저런 일들도 하면서 차츰 상황은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이들 부부에게 유일한 기쁨은 딸이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딸은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로운 한국 생활에 만족해 하며 좋은 대학에 합격해 내년에 입학하게 됐다.
행복한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가슴 한구석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딸의 행복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떠올라서다. 북에 남은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까.
탈북 1년 전에 찍은 류현우 전 대사(앞줄 오른쪽) 가족 사진. 류현우 전 대사 제공
● 북한에서 아랍어를 배운다는 것
류 전 대사의 부친은 북한에서 핵심 중의 핵심 계층이었다. 1952년 최고사령부 친위중대에 입대한 부친은 43년 동안 김일성 경호부대에서 근무했다. 호위사령부 제1호위국 부부장(대좌)까지 하다가 1995년 3월 정년퇴직했다.
부친이 친위중대에 들어간 것은 함흥에서 리당위원장을 지내던 할아버지가 1951년에 현물세를 내기 위해 가다가 미군 폭격에 죽어 애국열사가 됐기 때문이다.
김일성 호위부대도 외부와 격리된 평양 대성구역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 그가 어렸을 때 김일성 호위부대 군관들에 대한 공급은 꽤 좋았다. 입쌀을 풍족하게 배급받았고 매달 돼지고기 5kg, 기름 2L 등 기타 공급도 좋았다. 맡겨진 일만 잘하면 먹고살 걱정이 없었다.
1972년에 태어난 류 전 대사는 호위국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인민학교를 마치고 1983년 평양외국어학원 입학시험을 쳤다. 평양외국어학원 입학시험 자격을 받는 것 자체도 아무나 받지 못하는 특권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지원하는 학생들 출신이 보통 집안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에 가장 인기 좋았던 프랑스어학과를 1지망으로, 영어를 2지망, 아랍어를 3지망으로 써 냈다. 하지만 더 권세 있는 집 자식들에게 밀려 아랍어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엔 북한과 아랍어 하는 나라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다.
북한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곳은 평양외국어학원 아랍어학과 밖에 없었는데, 그가 들어갔을 때 아랍어학과 한 학년 인원은 5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 시리아 이집트 같은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아랍어 인기도 높아졌다.
1989년 학원을 졸업한 그는 당연하게 평양외국어대 아랍어학과에 진학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랍어는 이슬람교와 떼어놓을 수 없는 언어다. 가령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아랍어에선 ‘알라의 은총으로’라고 말한다. 아랍어를 잘하려면 이슬람교를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데, 문제는 북한에선 어떤 종교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대학에 입학해 1년쯤 지난 1990년에 그는 공부를 위해 이슬람교 종교적 문구를 따로 정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이를 대학 보위부에 밀고했다. 대학 보위원은 그를 불러 “이슬람 경전을 공부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며 사정없이 구타한 뒤 부모를 불렀다. 그때 그는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매를 맞았다.
1호위국 부부장이 일개 대학 보위원에게 찾아가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고, 보위부 지인들을 다 동원해서야 이 일은 겨우 무마될 수 있었다.
채널A 북한 관련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 출연을 앞두고 대기실 앞에 선 류현우 전 대사. 류현우 전 대사 제공
● 맹장과 담낭을 잃은 고난의 행군
1994년 그는 대학을 졸업했다. 운이 없게도 그해부터 대학 졸업생은 3년 동안 노동 현장 체험을 시키라는 김정일 지시가 하달됐다. 그 이전까지 대학 졸업생은 3대 혁명 소조원으로 3년 동안 파견돼 나름 큰소리 치며 살 수 있었는데, 1994년 이후부터는 노동자가 돼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래도 3년 동안 일을 잘하면 노동당에 입당시켜 준다기에 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계로 자원했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맹추위의 강계 같은 어렵고 힘든 곳에 가서 노동계급화 해야 입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큰 실수였다. 1995년부터 북한엔 배급이 끊긴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지역의 하나가 강계였다.
강계시 양정사업소로 간 그는 고난의 행군의 비참함을 3년 동안 온몸으로 느꼈다. 관을 짤 판자도 없어 그냥 땅에 묻은 시신을 개들이 파내어 살점을 물고 다니는 광경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대두박과 벼 뿌리, 흙까지 파먹었지만 20대의 허기를 극복할 수 없어 남들처럼 농장 밭에 들어가 도둑질도 서슴없이 했다. 3년 동안 못 먹을 것들을 먹으며 고생하다 보니 맹장과 담낭을 다 떼어내야 했다.
나무를 패다가 도끼로 발등을 찍은 일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마취제도 없이 꿰매다가 정신을 잃기도 했다. 지금도 그의 발엔 생살을 꿰맨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귀한 아들이 강계에서 이렇게 살 동안 부모들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1995년 3월에 제대한 부친은 곧바로 생계 전선에 내몰렸다. 김일성 호위부대 부부장이었다고 해서 당국이 베푸는 특혜는 하나도 없었다. 배급이 끊겨 부부가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차에 지인이 준 100달러를 밑천 삼아 만두 장사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친은 밀가루를 반죽해 어머니와 함께 하루 종일 만두를 빚었다. 국가계획위원회 간부로 은퇴한 모친은 하루도 빼지 않고 저녁마다 김일성대 후문에 만두를 이고 가서 팔았다. 그렇게 그의 부모도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16년 오만 외무성 부상 방북 때 류 전 대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리수용 북한 외무상(가운데)의 통역을 하고 있다. 류현우 전 대사 제공.
● 외교관으로 탄탄대로
1997년 끝날 것 같지 않던 현장실습생 생활도 끝났다. 그런데 김정일의 말이 또 바뀌었다. 현장 체험생은 노동당에 입당시키지 말라고 한 것이다. 3년 노력이 허사가 됐다.
노동당에 입당하지 않고선 외교관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는 군에 자원 입대했다. 공군 1사단에 입대해 개천 원리비행장에서 3년 동안 군복무를 했다. 3년 뒤 마침내 노동당원이 됐고 원하던 외무성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김정은 금고지기인 장인 도움으로 승승장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아랍어과 출신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에 입당한 아랍어과 졸업생은 더 적었다.
그는 노동 체험 현장에서나, 군복무 기간에도 아랍어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나중에 그는 김정일 아랍어 통역사를 양성하는 ‘1호 통역 후보생’이 됐지만 김정일이 아랍 국가 수반들을 거의 만나지 않아 직접 통역할 기회는 없었다.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외무상의 아랍어 통역은 매번 담당했다. 실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9호실 실장 사위가 된 것도 우연한 인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과 아내의 큰아버지가 과거 최고사령부 친위중대 같은 분대에서 복무했던 전우 사이였던 것이다.
“내게 시집가야 할 조카딸이 있는데.” “내게도 장가를 보낼 아들놈이 있소.” 이렇게 류 전 대사와 부인은 선을 보게 됐다. 아내는 김일성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박사원(대학원)에서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서로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청춘남녀인지라 결혼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2002년 결혼식을 올렸고 딸도 태어났다.
북한에선 결혼하면 남편 집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내도 처음엔 류 전 대사 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류 전 대사 부모와 류 전 대사 누나 부부까지 세 가족이 살아야 했다. 딸이 자식까지 낳고 방 한 칸 없이 고생하는 것을 본 장인이 “우리 집이 다섯 칸이니 들어와 살라”고 해서 류 전 대사의 처가살이가 시작됐다.
아랍어 같은 희귀어를 전공한 외교관은 외국 파견 주기가 빠르다. 영어나 프랑스어 전공 외교관은 외국 대사관에 한 번 나가려면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희귀어는 전공자가 몇 명 없는 가운데서 돌려 쓰다 보니 자주 나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38세였던 2010년 시리아 대사관에서 3년을 지내고 귀국한 뒤 2016년 10월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로 나갔다. 외무성에 있을 때는 1부상 서기, 부국장급인 외무성 2급 연구원 등을 지냈다.
낯선 땅에서 반겨주는 이도 거의 없지만 류현우 전 대사는 가장의 무게를 느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류현우 전 대사 제공
● 목숨보다 귀중한 그림
한국에는 3만5000명에 가까운 탈북민이 있다. 온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류 전 대사의 탈북 이유는 가장 어이없는 경우에 속한다. 그는 배고픈 사람도 아니었고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니었다. 운명이 바뀐 이유는 그림 한 점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라면 굶어 죽어도, 맞아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김정일 얼굴이 들어간 유화는 가족을 지킬 명분과 용기조차 앗아갔다.
북에 소환돼 가족과 함께 죽는다고 해도 나머지 가족을 살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본인 집안이나 처가 모두 정치범 가족이란 누명을 쓰고 대대로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특히 10대 딸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살 것을 생각하니 부모는 정치범이 될 비장한 각오마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아들처럼 아끼던 장인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장인은 김 씨 일가 금고지기로 27년을 살았지만 단 1달러도 따로 챙기지 않았다.
김정은의 주머니는 두 개다. 류 전 대사 장인이 관리한 39호실 자금을 ‘당 자금’이라고 했고, 당 본부 서기실 36국이 관리하는 자금을 ‘혁명 자금’이라고 했다. 거창하게 혁명 자금이라고 붙였지만 실은 김 씨 일가 사생활에 드는 돈, 즉 각종 사치품 사는 데 쓰는 돈이다. 36국이 달러를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는 김정은만 알 뿐, 북한 최고 비밀에 속한다.
39호실 자금도 김정은 지시에 따라 지출되긴 하지만 김 씨 일가 사생활을 위해 쓰진 않는다. 대신 굵직굵직한 공사가 벌어질 때마다 거액이 지출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몰래 빼돌릴 수 있었지만 전일춘 실장은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김정일과 김정은에게 대를 이어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평생을 정직하게 살았어도 딸과 사위의 탈북 때문에 말년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한 체제에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림 하나 때문에 대사를 탈북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체제라는 꼬리표도 붙게 됐다. 류 전 대사는 이런 시스템을 북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비록 가슴 아픈 대가를 각오하고 온 길이고 한국에 와서 기대했던 대우는 받지 못하지만, 딸을 보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딸은 무척 행복해 보인다. 내년에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할 생각이다. 수령의 노예가 될 뻔했던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의 땅에서 성장하는 딸을 보면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다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죄책감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던 아내도 다시 일어났다. 서울 모 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내년 1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게 된다. 류 전 대사도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운명의 배를 타고 왔지만 아직 종착점이 어딘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은 전혀 다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 삶의 ‘2절’을 시작했다. 영화 은비녀 주제가 2절 가사는 북한이 그를 위해 만든 노래인 것 같기도 하다.
눈물을 흘리며 떠나온 고향내 다시 돌아갈 그날은 언제냐하늘가 저 멀리 철새가 날을 때면눈물 없는 내 나라가아 그리워라.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