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이번 기사는 평소보다 약간 더 깁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복잡한 역사를 풀다 보니 몇 단락 더 얹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시신’ 대관식
바다이야기게임장 피에르 샤를 콩트, 1361년 이네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식(일부 확대), 1849, 캔버스에 유채, 130.3x97.8cm, 리옹 미술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모두가 넋을 놓았다.
하나같이 말을 잃었다. 국왕 대신 옥좌에 앉아 있는 건,
바다이야기사이트 땅에서 막 꺼내온 여성 시신이었기에.
다들 왕비에게
예를 갖추길 바란다.
1361년의 어느 날,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의 수도원. 왕 페드루 1세가 귀족과 신하, 시녀까지 긁어모은 채 입을 열었다.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이러
골드몽릴게임 한 경고에, 멍하니 서 있던 자들은 그제야 무릎을 꿇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울렸다. 수도자 수백명이 성가를 불렀다. 페드루 1세의 반려자, 이네스 데 카스트로. 그녀에 대한 왕비 대관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으레 왕비 대관식이 그렇듯, 이날 행사의 절정 또한 정해져 있었다.
왕 페드루 1세와 왕비
백경게임 이네스가 마주 보며 진실한 통치를 약속하는 그 순간이었다. 때마침 횃불이 치솟듯 타올랐다. 호위군이 들어올린 검과 창끝 또한 사방에 빛을 튀겼다. 그리고 이제는 꽤 지루한, 형식적인 몇몇 절차만 남았다고 여겼는데….
피에르 샤를 콩트, 1361년 이네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식
바다이야기게임사이트 (일부 확대), 1849, 캔버스에 유채, 130.3x97.8cm, 리옹 미술관
“모두에게 기회를 주겠다.”
페드루 1세가 그 흐름을 막아 세웠다. 장내가 술렁였다. “왕비에게 직접 충성을 표할 수 있는, 그러한 영광을 허락하겠다.” 귀족들은 물벼락을 맞은 듯 서로를 쳐다봤다. 기괴한 어수선함이 천장 끝까지 차올랐다.
“시작하라.”
한 명씩 고개를 들었다. 서열이 높은 이부터 줄지어 옥좌 앞으로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러지 않으면 당장 목이 떨어질 분위기였다.
한 사람씩 그녀 앞에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재차 몸을 낮춘 채 손등에 키스하며, 그렇게 무한한 존경과 충성을 맹세했다. 다들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절대, 절대로 헛구역질 따위를 하면 안 됐다. 그것만큼은 죽을힘을 다해 참아야 했다.
이네스는 이날부로 국가의 정식 왕비였다. 하지만 정작 이네스 본인은 아무런 감흥도 없어보였다. 지금껏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손가락 마디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네스.옥좌에 앉은, 분을 바른, 반짝이는 천과 장신구를 두른 그녀는, 오래전 죽은 사람이었으니.
피에르 샤를 콩트, 1361년 이네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식, 1849, 캔버스에 유채, 130.3x97.8cm, 리옹 미술관
19세기 프랑스 화가 피에르 샤를 콩트가 이 장면을 상상해 그림을 그렸다. <1361년 이네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식>이 그것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금관을 쓴 왕비, 이네스다. 그녀의 얼굴은 납빛이다. 푸르스름한 피부에선 생기 따위 감돌지 않는다. 뜰 수 없는 눈, 열지 못하는 입, 펼 수 없는 손가락에서 엿볼 수 있는 건 그간 착실히 이뤄진 사후경직 현상뿐이다.
서 있는 페드루 1세의 눈빛은 공허해보인다. 다만 표정과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흘러내릴 듯한 이네스 옆에서 이럴 수 있는 건, 광기가 몸 구석구석에 깃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귀족 또는 신하로 보이는 이가 이네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탁해진 손등에 입술을 맞춘다. 이 모든 게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해보인다. 하지만, 코끝을 찌르는 시취(屍臭)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촉을 두고 거듭 소름이 돋지는 않았을지.
페드루 1세를 뺀 모든 이는 말도 안 되는 상황 앞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누군가는 왕을 노려본다. 처세가 서툰 아이는 대놓고 몸을 움츠린다. 아예 고개 숙여 기도하고, 얼굴을 돌린 채 눈을 감는 자도 있다. 옥좌 뒤에 선 여인들 또한 뻣뻣하게 서 있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잔혹한 전설
페드루 1세 무덤에 놓인 누워있는 조각상, 1360년경
페드루 1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이날 이네스, 정확히는 이네스의 시신을 국모이자 자신의 왕비로 공식 선언했다.
그뿐인가. 모든 참석자가 그녀의 껍데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기괴한 장면을 끝까지 지켜봤다.
이 시체 대관식은 지금도 포르투갈에서 가장 유명한 전설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난 건 천년의 사랑 탓인가, 출구 없는 광기 때문인가. 페드루 1세와 이네스, 귀족과 신하들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빚어진 사연일까.
엇갈린 사랑, 어긋난 순간
작자미상, 이네스 데 카스트로, 19세기경
1340년. 그러니까, 참혹한 대관식이 열리기 21년 전의 어느 날.
페드루 1세는 그때 이네스를 처음 봤다. 당시 그는 스무 살, 그녀는 열다섯 살이었다.
페드루 1세는 즉시 사랑에 빠졌다. 멀리서도 눈이 마주친 이네스, 그녀 또한 그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훗날 몇몇 학자들은, 이때 이네스가 “백로(白鷺)의 목선을 드러냈다”고 묘사하게 된다.
“저 소녀가 나와 맺어질 상대인가?” 페드루 1세가 물었다. “맨 앞에서 걸어오는 분을 말씀하십니까?” 시종이 되물었다. “아니, 한 발 뒤에서 따라오는….” “그분은 아마 시녀일 겁니다.” 시종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페드루 1세는 오래전부터 이날을 기다려왔다.
그는 당시 포르투갈 왕국 왕위 계승 1순위에 오른 왕자 신분이었다. 그는 조국의 안정을 위해 인근 강대국인 카스티야 왕국에서 온 여인과 결혼해야 할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남녀 관계를 외교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이었다.
다만, 페드루 1세 본인은 이 상황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는 왕족의 운명이 으레 그렇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또, 아내가 될 여인은 손꼽히는 유력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가 기품과 지성을 함께 갖춘 미인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렇기에 외려 신부를 기다려왔는데… 페드루 1세의 반려가 될 이는 그날 첫눈에 반한 이네스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서 수줍게 인사한 건, 콘스탄사 마누엘이라는 스물두 살 여인이었다. 콘스탄사는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품격과 품위가 함께 있는 재원이었다. 소문은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페드루 1세와 콘스탄사, 그리고 이네스. 이들 사이에는 첫 순간부터 설렘 아닌 묘한 긴장감만 흐를 수밖에 없었다.
로케 가메이로, 콘스탄사, 1899
사실, 당시 페드루 1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콘스탄사의 손을 잡아야 했다.
상황이 그랬다. 이번 결혼은 페드루 1세 가문과 콘스탄사 가문 사이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묘수였다.
호세 마리아 로드리게스 데 로사다, 알폰소 11세, 1892~1894, 캔버스에 유채, 179x104cm, 레온 시의회
그 시절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은 알폰소 11세였다.
그가 일찌감치 신붓감으로 찍어둔 이가 있었다. 지금은 페드루 1세 앞에 있는 여인, 콘스탄사였다. 카스티야 왕국 내 후안 마누엘(콘스탄사의 아버지)의 입김이 워낙 센 만큼, 그 영향력을 흡수하고자 한 행보였다. 이들은 실제로 정식 결혼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그사이 알폰소 11세는 자기 나름대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입지가 탄탄해진 만큼, 내부 귀족 가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콘스탄사와의 혼사도 일방적으로 무르고 말았다. 역풍이 두려웠던 그는 이 과정에서 콘스탄사를 성에 감금시키기도 했다. 알폰소 11세의 장인이 될 뻔한 후안, 그의 왕비 수업에 한창이던 콘스탄사에게는 모욕감만 남은 사건이었다.
안토니오 데 홀란다, 아폰소 4세(페드루 1세의 아버지), 1530~1534년경
이런 가운데, 알폰소 11세는 곧 새로운 여인을 결혼 상대로 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인근 국가, 포르투갈 왕국의 마리아였다. 마리아. 그녀는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왕이었던 아폰소 4세(페드루 1세의 아버지)의 딸이었다. 즉, 페드루 1세의 누나이기도 했다. 알폰소 11세는 그런 마리아를 가교삼아 활동 무대를 포르투갈 왕국으로 넓힐 생각이었으리라. 하지만 알폰소 11세는 또 한 번 사고를 쳤다.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리고도 정부(情婦)와 놀아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알폰소 11세는 그렇게 두 진영의 적을 만들고 말았다.
마리아의 아버지, 아폰소 4세의 포르투갈 왕국 세력. 또, 앞서 모멸감을 준 콘스탄사의 아버지, 후안 마누엘의 세력.
나의 적의 적은 동료이지 않은가. 아폰소 4세의 아들 페드루 1세, 후안 마누엘의 딸 콘스탄사는 이 과정에서 맺어진 것이었다. 이는 알폰소 11세에게 당한 양측이 힘 모아 역습을 가하는 수였다. 그렇게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압박과 견제를 가할 구상이었다.
결혼은 ‘마지막 퍼즐’
페드루 1세와 콘스탄사의 결혼. 그것은 서사시처럼 흘러간 이번 작전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왕 아폰소 4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실력가 후안 마누엘이 함께 둘 수 있는 최고의 승부수였다. 이를 집어들어 판에 놓으려는 순간, 이네스라는 변수가 등장하고 만 것이었다.
‘변수’에… 빠져들다
외제니 세르비에르, 아폰소 4세 국왕 발치에 엎드린 이네스와 아이들, 1822, 캔버스에 유채, 115.3x142.5cm, 베르사유 궁전
페드루 1세가 끝내 마음을 준 상대는 콘스탄사가 아닌, 이네스였다.
페드루 1세는 이네스와의 은밀한 시간을 즐겼다. 수도관을 통해 몰래 러브레터를 건네는가 하면, 궁정 시선을 피해 둘만의 비밀 공간을 차리기도 했다. 어떤 사랑은 불안과 위험에서 더 꽃을 피운다. 둘의 속삭임은 갈수록 애달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절실해지기만 했다.
이러한 관계는 콘스탄사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더 거침이 없어졌다.
페드루 1세는 첫날 첫 순간부터 이네스만 마음에 품었다. 다만, 결혼 자체는 마지못해 콘스탄사와 한 상태였다. 차곡차곡 맞춰진 거대한 판을 뒤엎을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페드루 1세와 콘스탄사는 아들 페르난두 등 자식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 9년차가 된 1349년. 콘스탄사는 재차 출산의 통증을 겪은 후 후유증으로 숨지고 말았다. 콘스탄사의 입장으로 보면, 여러모로 기구하고 서글픈 생의 마감이었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콘스탄사의 아버지, 후안 마누엘도 사망했다.
페드루 1세가 자신의 빈 옆자리에 앉히고 싶어 한 이? 당연히 이네스였다.
그는 이미 이네스를 아내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녀를 “오직 단 하나의 사랑”이라고 칭하는가 하면, 관계를 맺고 자식도 줄줄이 낳았다. 이제, 이네스의 궁 입성도 얼마 남지 않아보였다. 그런데….
말리려는 父, 안 통하는 子
콜룸바노 보르달로 피네이로, 이네스의 비극, 1901~1904, 리스본 군사 박물관
판의 설계자,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왕 아폰소 4세(페드루 1세는 그때도 아직은 왕자 신분이었다).
그는 이 상황이 갑갑했다. 그가 볼 때 페드루 1세와 이네스의 로맨스는 대형 사고였다.
페드루 1세와 이네스가 정식으로 결혼한다?
그것은 기껏 차린 밥상을 카스티야 왕국의 또 다른 유력 세력, 이네스의 카스트로 가문에 헌납하는 꼴이었다. 심지어 페드루 1세와 콘스탄사의 아들 페르난두가 아닌, 이네스와의 또 다른 자식이 언젠가 왕위에 오른다면… 이는 최악 상황이었다.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집안 때문에 권력 구도가 엉망으로 흐트러질 판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네스는 서녀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낳은 딸이었다. 이는 이네스가 앞서 콘스탄사의 시녀 취급을 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포르투갈 왕국의 귀족과 한직의 신하들까지도 이네스를 차갑게 대했다. 왕비는커녕,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일 자체가 국격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시선이었다. 요즘과 달리,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아폰소 4세는 아들 페드루 1세에게 이네스가 아닌 다른 여인을 줄줄이 소개했다. 통하지 않자 이네스를 아예 국경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둘을 갈라놓지 못했다. 이네스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여러 위기를 겪고도 페드루 1세와 있으려고 한 점을 보면, 그녀 또한 절절한 사랑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지는 않았을지. 물론, 정치적 계산이 일부 깔려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페드루 1세와 이네스가 함께 있는 사이, 이네스 집안의 적지 않은 이가 양지로 진출했다고도 하니.
결국, 사형을 선고하고
카를 브률로프, 이네스 데 카스트로의 죽음, 1834, 캔버스에 유채, 213x290.5cm, 러시아 박물관
제발,
아이들은 살려주세요!
1355년의 어느 겨울, 늦은 밤.
이네스와 그의 자식들이 살던 코임브라의 한 수도원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건장한 사내 셋이 이네스의 무릎을 강제로 꿇리고 있었다. 자객이었다. 정확히는, 아폰소 4세의 사주를 받은 최측근 신하들이었다. 이네스를 몰래 죽여버리는 것. 이는 아폰소 4세가 떠올린 최후 수단이었다. 공기는 서늘했다. 달빛에 눌린 돌바닥은 차가웠다. 지금,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왕국을 혼란스럽게 하고 (…)
왕자를 현혹해 판단력을 흐리게 한 대가로 (…)
이네스 데 카스트로.
그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일부 전해지는 설에 따르면, 아폰소 4세 또한 직접 동행해 이러한 사형 선고문을 읊었다고 한다. 다만 역사적으로 확실한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
이날, 이네스의 목은 맥없이 잘렸다. 드레스 위로 피와 눈물이 번졌다. 그러니까, 이네스는 이때부터 죽은 몸이었다. 나이는 아직 서른 번째 생일에 닿지 못한, 스물아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자미상, 이네스의 암살 장면, 19세기경, 석판화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페드루 1세는 거의 미쳐버렸다.
전말을 안 후부터는 아폰소 4세를 상대로 반란까지 일으켰다. 페드루 1세는 어머니 베아트리스의 눈물 어린 호소 끝에 겨우 갑옷을 내려놓았다. 혈육의 정은 깊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부자 사이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두 사람 또한 차츰 화해 수순을 밟는 듯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왕국 국왕 자리에 올랐다.
아폰소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이때가 1357년 5월이었다. 이네스가 처형되고서 근 2년, 이에 따라 발발한 반란이 멈춘지는 고작 몇 달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날부터 페드루 왕자는 정식으로 페드루 1세가 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일곱이었다.
안토니오 데 홀란다, 베아트리스(페드루 1세의 어머니·왕이자 남편인 아폰소 4세와 왕자이자 아들인 페드루 1세 사이 반란을 중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30~1534
그렇게 왕권을 쥔 페드루 1세는, 의외로 이네스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네스의 뿌리와 행보를 조롱했던 귀족과 신하들을 바로 눈앞에 두고서도 그랬다.
페드루 1세는 차분했다. 오직 외교와 행정에만 관심을 두는 듯했다.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따로 정부를 두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의 절절한 사랑도 결국 잠잠해지고 말았을까. 아니었다. 그는 이네스를 잊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핏줄이 설 만큼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는 상태였다. 그는 국왕으로의 권위부터 세울 생각이었다. 이후 세기의 사랑을 방해했던 모든 이들에게 최악의 보복을 가할 마음이었다. 페드루 1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치밀하고… 잔혹했다.
“내 심장은 가루가 됐다”
페드루 1세는 때가 됐다고 판단했을 때, 과거 이네스를 죽였던 신하 중 두 명의 심장을 뽑아버렸다.
그들은 문제의 그 일을 치른 후 국경을 오가며 숨어 살고 있었다. 세 사람 중 한 명은 겨우 도망쳤지만, 나머지 둘은 결국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지금껏 괜찮아보였던 건, 그날 이후 심장이 가루가 됐기 때문이었소.”
포르투갈 연대기 작가 페르낭 로페즈(1385~1459 이후) 등에 따르면, 페드루 1세는 두 원수의 심장을 꺼내기 전 이런 말을 했다. “나와 똑같은 고통을 꼭 안겨주고 싶었다오.” 그리고, 이러한 말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이때가 1361년이었다. 그 무렵 페드루 1세가 암살자 셋 중 둘을 붙잡아 공개재판에 회부하고, 실제로 사형에 이르게까지 한 데 대해선 대체로 진실로 통한다. 하지만, 직접 심장을 꺼냈다는 식의 이야기는 상징적으로 각색된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한편, 페드루 1세는 이 무렵에 기다렸다는 듯 폭탄선언을 했다.
나와 이네스는 진작에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 이는 이네스가 살해당하기 직전에 행한 일이기에, 이네스는 죽어서도 왕국의 왕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거? 없었다. 결혼 증서도, 교황청 승인서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비공개로 이뤄졌었다는 식의 논리라면, 이를 파훼할 방법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말에 반박할 자가 있소?” 페드루 1세가 물었다. 한자리에 모인 궁의 사람들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의문이라도 표하는 순간,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손의 다음 표적이 될 듯했기에.
가장 통렬한 복수
작자미상, 이네스의 사후 포르투갈 왕비 대관식, 19세기경, 석판화
이제, 이네스는
나의 정식 왕비가 되었노라.
죽은 이네스에 대한 왕비 대관식.
이 소름 끼치는 행사는 페드루 1세가 이네스 암살자를 응징한 직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네스의 관에서 시신을 꺼내고, 드러난 뼈와 훼손된 부위를 조립한 후, 값비싼 옷과 향수를 두른 뒤 그 상태로 옥좌에 앉혔다고 한다. 귀족부터 시녀 등 빠짐없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한 일은, 페드루 1세가 꿈꿔온 가장 통렬한 복수였을 터였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확실히 알아둬야 할 점이 있다. 현대 사회의 역사가 대부분은 이 시체 대관식을 문학적 상상력이 짙게 들어간 이야기로 간주한다. 일종의 전설 내지 설화로 여긴다는 뜻이다. 과거의 유명 화가마저 그 장면을 그릴 만큼 오래전부터 전해진 사건이라지만, 실제로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 내지 증거는 없다는 의미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이네스를 향한 페드루 1세의 마음. 이는 역사를 넘어 신화와 전설의 경계까지 닿을 만큼 강렬했다는 것이다.
페드루 1세는 10년간 포르투갈 왕국을 이끌었다.
‘잔혹왕’이라는 말이 따라올 만큼 복수에는 가차 없었지만, 이와 별개로 ‘정의왕’이라는 별명이 생길 만큼 통치력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왕은 특히 사법 체계를 더욱 체계적으로 손보는 데 공을 들였다고 한다. 범죄자에게는 가혹한 한편, 힘없는 백성과 피해자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면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페드루 1세는 1367년 1월, 마흔일곱 나이로 중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이 더는 거뜬해질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유언장도 썼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이네스를 죽이고 도망친 마지막 암살자, 그의 죄를 직접 용서하기도 했다.
페드루 1세는 며칠 밤사이 눈에 띄게 여위었다.
그러곤 여느 때와 같이 잠들었는데, 다시 눈을 뜨지는 못했다. 그때가 1월18일의 오전이었다. 페드루 1세는 죽어서 다시 이네스에게 갈 수 있었다. 그는 사망하기 전 알코바사 수도원에 본인과 이네스를 위한 새로운 무덤 공사를 지시했었다. 영혼의 재회는 그 결과 이뤄질 수 있었던 일이었다. 양 무덤은 마주 보고 있다. 이는 언젠가 찾아올 최후의 심판에서 부활하게 되면, 가장 먼저 서로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다만 원래는 무덤이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수 세기가 흐른 후 지금과 같은 구도가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리석에 새겨진 문장은 다음과 같다. ‘Ate o fim do mundo….’ 즉, ‘세상의 끝까지.’ 사랑은 어디까지 애절해질 수 있는가. 또, 어느 지점까지 잔혹해질 수도 있는가. 이 정도면 사랑도 신화와 전설이 될 법하다. 말 그대로, 미친 사랑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윌리엄 스켈턴, 이네스 데 카스트로, 19세기경
참고 자료
Lopes, Fernao., Chronica del Rey D., Pedro I. Lisbon: Lisboa Occidental
Caetano de Souza, Antonio., Historia Genealogica da Casa Real Portuguesa. Vol. I. Lisbon: Lisboa Occidental
d‘Avray, David., Papacy, Monarchy, and Marria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