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훈정동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맞은편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부지가 방치돼 있다. /박지윤 기자
“대로변 상점은 그나마 외관에 신경을 써서 덜 낡아 보이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지붕들이 전부 판자로 돼 있어요. 매년 누수가 발생하는 상점도 있고, 기본적인 시설 자체가 노후돼서 하루빨리 재개발을 추진해야 해요.” 지난 11일 재개발 추진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고 있는 서울시 종로구 종묘 앞 세운상가에서 장사를 하는 60대 이모씨는 “세운2~3구역과 마찬가지로 세운4구역의 노후도가 심각한 상황이다”라며 이 렇게 말했다. 1970년대 국내 전자·전기 산업의 ‘메카’로 불렸던 세운상가는 지어진 지 57년이 되면서 노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페인트를 덧칠했지만 건물 곳곳에 금이 간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외벽의 누수 자국도 눈에 띄었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종로3가 세운2구역 재개발 사업지 전경. /박지윤 기자
◇ 세운4구역·세운상가, 20년째 재개발 사업 지연 세운상가를 포함한 세운4구역은 재개발 사업을 추진한 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정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종묘 앞에 위치한 탓이다. 세운4구역은 종묘와 173~199m 떨어져 있어 보존 지역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종묘에서 바라보는 외부 경관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유산청 등의 반대가 있어 세운4구역의 정비사업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재개발을 통한 건축물 높이를 하향 조정하며 사업성이 떨어진 점도 재개발 사업의 지연 요인 중 하나였다. 세운4구역 재개발은 최근 대법원이 문 화재 주변 개발 요건을 완화한 서울시의 조례 개정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탄력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종묘 앞에 고층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또다시 사업 동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지난 6일 문화재 주변 개발을 완화한 서울시의 조례 개정이 적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세운4구역에는 최고 높이 14 2m의 고층 건물이 들어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 이후인 지난 10일 김민석 국무총리가 종묘를 방문해 “서울시 이야기대로 종묘 바로 코앞에 고층 건물이 들어선다면 종묘의 눈을 가리고 숨을 막히게 하고, 기를 누르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며 “도심 속 문화유산,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역사적 가치와 개발 필요성 사이의 지속 가능한 조화를 찾아가는 문화적 개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가유산청은 서울시가 계획을 강행할 경우 종묘의 세계유산 등재가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종묘만 보고 올 게 아니라 세운상가 일대를 모두 둘러보기를 권한다. 세계인이 찾는 종묘 앞에 더는 방치할 수 없는 도시의 흉물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온당한 일이냐”고 반박했다. 오 시장은 지난 2000년대 중반, 유네스코 유산담당자가 서울에 직접 방문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세운4구역을) 122m까지 지어도 된다고 했다”고도 말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장사동 세운상가 광장 앞에서 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 단체가 국가유산청의 세운4구역 개발 반대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하고 있다. /박지윤 기자
◇ “세운4구역 정치적으로 이용 말라”…재개발 지연에 주민들 초조 세운4구역과 세운상가의 재개발을 둘러싼 공방이 격화되면서 주민과 상인들은 재개발 사업이 지연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세운상가 2층에서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60대 김모씨는 “20년 전 종로구 예지동에서 장사를 하다가 재개발한다고 해서 세운상가로 옮겨왔다”며 “세운4구역도 철거를 끝내고도 공사를 못 하는데 세운상가 재개발은 한참 더 걸리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재개발 사업의 속도가 날 것이라고 예상하던 세운4구역 주민들도 정부와 서울시 간 재개발 논쟁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세운4구역 주민들은 이날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라’ ‘국무총리는 세운4구역 주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장사동 세운상가 외관. /박지윤 기자
세운4구역의 한 주민은 “세운4구역은 종묘 정전에서 바라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측면에 위치해 있다”며 “서울시와 국가유산청 간 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온 다음 날부터 맹목적인 높이 규제를 외치고 (재개발이 진행되면) 세계유산 지정이 해제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세운4구역 주민들의 땅을 놓고 정치인들이 정쟁의 판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세운4구역 주민들은 재개발 사업이 멈춘 탓에 재산상 손해가 막대하다고 토로하고 있다. 정인숙 세운4구역 주민대표회의 상근위원은 “철거를 마친 지 벌써 3년이 됐는데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매달 20억원의 금융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며 “지난 2023년 3월 이후 약 600억원의 금융 비용이 누적된 상태다”라고 말했다. 정 상근위원은 “주민들이 서울시를 믿고 재개발 사업에 착수하면서 세입자도 이주해 월세 수입이 끊기고 오히려 생활비를 대출받아 연명하고 있다”며 “이번에 국가유산청과 문화부가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 추진을 가로막고 정치적 싸움터로 전락시킨다면 단호하게 손해배상, 직권남용 등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기자 admin@slotmega.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