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동아일보는 독자가 궁금한 점을 편지로 알리면 그에 대해 신문사가 취재로 답하는 형식의 기사를 선보였다.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에 걸쳐 경성 숭인동에 사는 한 여학생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으로 ‘김마리아 양 조선 탈주 전말(顚末)’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탈주(脫走)는 원래 탈신도주(脫身逃走), 즉 ‘감금된 곳에서 몸을 빼어 달아남’을 뜻하는 말인데 병든 몸으로 조선을 탈주해 미국으로 향하는 그 이야기를 한번 읽어 보자. “김마리아 양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시내 정신(貞信)여학교를 졸업하고 3~4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가 다시 동경에 건너가 동경여자학원 문과에서 공부를 하다가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 봄에 며칠 남지 않은 졸업기를 앞에 두고 귀국하여 3.1 운동의 선동자로 3월 610원야마토게임 일에 잡혀 5개월 동안이나 서대문 감옥에서 철창 생활을 하고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동짓달에 또다시 애국부인단 사건으로 대구 감옥에서 별의별 고초를 다 겪고 병(病)으로 마침내 목숨만 겨우 붙어서 그 이듬해 4월 29일에 보석이 되었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일 것입니다. 여위고 또 여윈 몸으로 어떻게 그 많은 눈을 피하여 철통 같이 둘러싼 경계망신천지릴게임 을 벗어났었을까 하는 것을 우선 기자는 일일이 조사하여 독자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드릴까 합니다. 그가 대구 감옥에서 보석이 되어 나오게 된 후에 옥중에서 얻은 ‘비상악골충’이란 병으로 세부란스 병원에서 처음 수술을 하고 그 병이 또다시 재발하여 그해 10월에 한양병원에 입원하여 두 번째 수술을 받고 반 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일구월심(日久月深릴게임추천사이트 ) 어느 때든지 부자유한 자리를 떠나려고 벼르고 별렀답니다. 그 이듬해 봄 4월에 한양병원에서 퇴원하여 시외 성북동 어떤 노파의 집에 김근포((金槿圃)라고 변명(變名)하고 세밀하게 탈주의 계획을 세워 가지고 세부란스 병원에 또다시 입원을 하였더랍니다. 대개의 준비가 다 되어 그가 불시에 퇴원을 하게 되던 때는 그해 6월 13일 오후 3시경이었는데, 그 병원매매정보 문밖을 나서자 얼른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인력거에 몸을 실고 우선 어떤 중국인의 요리점으로 가서 밤이 들기를 기다려 다시 중국 의복으로 변장을 하고 자동차에 몸을 실어 인천으로 줄달음을 쳤다고 합니다.” (8월 15일자)
탈출기는 계속된다 “그때에 김마리야 양은 첫 번째 케이엘넷 주식 철망을 벗어나 인천 어떤 인심 좋은 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버리기는 하였지만, 오랫동안 병상에 누었던 몸이 또한 자동차에 시달려 해로(海路)의 머나먼 길을 곧 떠날 수는 없었더랍디다. 그러나 동행자가 많을 뿐 아니라 인천이 그 역시 그러한 곳이었으므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가슴 울렁거리며 일주일 동안을 있다가 일행 11명이 남들이 자는 아닌 밤중에 중국 사람의 배를 얻어 타고 언제나 볼는지 알 수 없는 고국을 떠나게 되었었다는데, 김 양과 배를 같이 탄 일행은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군사국장으로 있던 도인권(都仁權)의 가족 3명과 군무부 참사로 있던 김긍준(金兢俊)의 가족 4명과 그 외 청년 2명이 모두 혁명가들이었지만 배의 닻을 감아 올리고 뱃머리를 돌릴 때 일행 중에는 한 줄기의 뜻깊은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었답디다. 그러나 김 양은 조롱에 갇혔던 새 모양으로 자유로운 천지를 향하는 기쁨이 얼굴에 가득하였답디다. 황해의 창랑(滄浪)을 헤치며 달리는 김 양이 탄 배는 어느덧 석도(席島)라는 서해안의 작은 섬까지 이르러 일기가 불순하여 사흘 동안을 그곳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곳 서동편으로 바라보이는 곳은 김 양이 자라난 황해도 송화(松禾) 고향이므로 김 양은 사흘 동안을 하루같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뱃머리에 힘없이 서서는 낯익은 고향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하였답디다. 배가 다시 떠나자 차츰차츰 고국의 땅은 멀어지고 풍랑에 흔들리는 배는 김 양의 병든 몸을 더욱 괴롭게 하여 이따금 그는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하였었답디다. 그리하여 미리 준비해 가지고 갔던 ‘몰핀’ 주사를 여러 번 맞았으며 일행의 정성스러운 기도와 따뜻한 눈물이 김 양의 몸을 늘 싸고 돌았었다 합디다. 그리고 가다가 바람이 불지 아니하여 끝없는 바다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배가 서 있기를 여러 번이었다는데, 그럴 때마다 선부(船夫)들의 축풍(祝風) 소리에 놀라기도 여러 번 하였고, 그러는 동안 이레 만에야 겨우 위해위(威海衛; 현재의 산둥성 웨이하이)의 땅 언덕을 멀리 바라보게 되었었답디다. ‘이제야 살았습니다’ 하며 날뛸 듯이 기뻐한 김 양은 위해위의 땅을 밟게 되었으나 감옥에서 얻은 고약한 병이 해상 생활 일주일 여에 더욱 위중하여 바로 상해까지 갈 수는 없었더랍디다. 그리하여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김 양만이 혼자 떨어져서 외로운 이역(異域)에 홀로 병으로 있게 되었었는데, 그때에 마침 어떤 동지 여자의 간호를 받으며 있었고 여드레 만인가 상해에 있는 그의 고모부 서병호(徐丙浩) 씨가 와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갔더랍디다. 상해에 가서도 그 병이 낫지 아니하여 단발까지 하고 치료를 하던 중 심장병까지 겹쳐 포석로 어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한다고 하였더랍니다.” (8월 16일자) 다음은 상해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이야기다. “김마리아 양은 상해를 가서도 그와 같이 병마에 붙들리어 3~4개월 동안을 병상에 누워 있다가 그해 늦은 가을에야 다소의 원기가 회복되어 퇴원을 하게 되었었다는데, 오래 동안 구속과 압박의 천지에서 마음대로 뛰어 놀지 못하여 늘 자유의 세계를 갈망하던 그는 병원에서 나오는 길로 또다시 상해에서도 그곳에 있는 애국부인회의 간부가 되고 의정원의 황해도 대의사가 되어 밤낮을 물론하고 눈코 뜰 사이가 없이 정치 운동, 부인 운동에 활동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 감탄치 않을 수 없었다고 합디다. 그는 동포를 살리는 길이 정치 운동에만 있지 않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깨닫는 동시에 우리 사람은 누구보다도 더 알아야 되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 미주(美洲) 유학의 뜻을 두고 얼마 동안 남경 금릉(金陵) 대학에서 준비를 해 가지고 상해에서 미주 유학의 길을 떠나기는 재작년 6월 21일이었더랍디다. 물론 그때 김 양의 건강은 물결 사나운 태평양을 건널만하게 튼튼하였음에도 아니지만 상해만 해도 고모의 남편인 김규식(金奎植) 씨와 서병호(徐炳浩) 씨가 있고 그의 고모들과 뜻이 같은 동포들이 있어서 고향이나 다름이 없는 그곳을 애석히 떠났던 것이랍디다. 김 양이 태평양의 험한 물결을 헤치고 22일 만에 대양을 건너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는 7월 11일이였더랍디다. 그는 20여 일을 배에서 시달렸기 때문에 예기(豫期)하였던 학창의 몸을 곧바로 둘 수는 없어서 일기 좋기로 유명하고 또한 동포들이 많이 사는 가주(加洲; 캘리포니아주)에서 근 1년 동안을 지내게 되었었다는데, 그는 그 1년 동안의 생활도 그리 단순하지는 못 하였다 합디다. 학비를 얻기 위하여는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 생활을 아니 할 수 없었으며 틈이 있는 대로는 낚싯대를 메고 물 맑은 냇가에 가서 한유(閑遊)하게 고기를 낚는 처사(處士)의 생활도 하였더랍디다. 그러나 천지로 집을 삼고 동서로 표류하는 그에게는 영원의 기념이 될 만한 ‘비상악골충’이란 병이 또 재발하여 얼마 동안을 ‘캔사스’ 어떤 유명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치 않을 수가 없었더랍디다. 그가 ‘미소라주 팍빌’에 위치를 둔 ‘파크’ 대학 문과에 입학하기는 그 이듬해 가을 즉 작년 9월이었다는데, 본래 총명하고 아담한 그는 반공생(半工生)으로 있으면서도 학과의 성적이 좋아서 일반 학생들의 경애(敬愛)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장 이하 여러 선생들의 사랑도 남달리 받고 있다고 합디다. 작년 10월인가 어떤 날짜 신문에 김 양에 대한 불명예한 사실이 기재되어서 한때 김 양의 비평들이 있었으나 파크 대학의 교장 ‘F. W. 하울리’ 씨의 말을 들으면 사실무근(事實無根)한 중상설(中傷說)이 분명하다고 합디다. 또 최근 김 양을 만나 보고 귀국한 모씨(某氏)의 말을 들으면, 김 양은 내년에 그 대학을 졸업하고 또 후과(后科)를 1년 더하여 상당한 학위를 얻은 후 교육계에 종신(終身)할 결심을 가지고 공부에만 열중인데, 어떤 좋은 기회를 기다려 고국의 동포 여러분을 뵙겠다고 하더랍디다.” (8월 17일자) 김마리아는 오랜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원산에만 머무른다는 조건으로 1933년 귀국했다. 귀국 후 원산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3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